한국 경제가 본격적 고도성장에 들어간 1970년대, 관가와 학계·언론계에는 '3대 웃음거리'가 있었다. 상공부가 제창한 '1981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 경제기획원의 '1인당 소득 1000달러' 목표, 교통부의 '경부선 전철화와 서울~부산 2시간 30분 주파' 계획이다. 당시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개발 연대의 꿈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함께 뛰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1976년 6월 19일 자 본지 1면 제목은 '81년 1인당 총소득 1284불'이었다. 연평균 9% 경제성장을 통해 1975년 530달러 수준이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1981년까지 2.4배인 1284달러로 올려놓겠다는 것이 당시 정부가 제시한 '장밋빛 청사진'이었다. 이마저도 국내 저축률은 62.7%에서 88%로, 조세 부담률은 16.9%에서 21.5%로 높여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였다. 조선일보는 "국민의 땀과 근검에 바탕을 둔 꿈의 청사진"이라고 불렀다. 발표 당일부터 기획 시리즈로 국민 부담, 고용, 보건의료, 물가 등의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회충 감염률을 44%에서 15%로,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38명에서 20명으로 낮추는 것이 목표였다. 국가통계포털 기준 2015년 우리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3.0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민소득 역시 목표 연도보다 훨씬 이른 1978년 1270달러로 넘어섰고, 지금은 3만달러를 넘는다.
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바탕엔 산업화 세대의 피와 땀이 있었다. 본지는 그 고난의 기억을 지면에 담았다. 1975년 9월 4일 자 등 독일 광부·간호사를 다룬 르포와 기획 기사 지면에는 "한국 간호사에게 신세 안 진 독일인 없다"는 현지 평과 "더위를 견디지 못해 팬티 한 장만 입고 착암기를 다루며 온몸에 석탄으로 흉터를 새겼던" 광부들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파독 근로자들의 송금은 순수 외화 획득이어서, 약 2만명에 달했던 이 해외 송출 근로자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돈은 "매년 해외 총수출액 대비 2%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2010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종합보고서).
중동 건설 신화도 이때 만들어졌다. 본지는 1976년 '중동이 뛰고 있다' 시리즈를 통해 중동 진출의 기회와 위험, 현장에서 땀 흘리는 우리 국민 이야기를 전했다. 동아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쿠웨이트를 연결한 총연장 200㎞ 도로 건설 현장 르포에는 땀이 묻어 있다. "기능공들은 더위가 닥치기 전에 80%의 공정을 해치우겠다는 결의로 하루 24시간 사막을 누빈다. 사막에는 밤이 빨리 온다. 해가 지기 무섭게 어둠이 덮치고, 하늘의 별과 달은 유난히도 푸르다. 그 고독한 사막의 밤을 헤드라이트로 밝히며 작업을 계속한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수출뿐이었다. 오일 쇼크 충격에 허덕이던 1975년 한국은 60억달러 수출 목표 달성도 힘겨웠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늘 위기에 강했다.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수출 100억불' 목표가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본지는 급부상하던 신흥기업과 고도성장기의 경제 영웅들을 집중 조명했다. '전문경영인'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대, 현대 이명박·정희영, 삼성 경주현·이수빈 등 30대에 고속 출세한 공채 출신 사장들과, 대우 김우중과 율산 신선호 등 젊은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1978년 '경영인' 시리즈에 담았다. 수출 중추였던 중화학공업, 국토 개조의 현장이던 공업단지, 선조들의 피 값인 대일 청구권 자금을 종잣돈으로 세운 포항제철, 보따리 장사에서 컨테이너선으로 도약한 수출상사 이야기로 국민을 북돋우고 정부 정책을 이끌었다. 현대 포니가 1만대, 삼성 컬러 TV가 3만대 수출됐던 1977년, 계획보다 훨씬 빨리 도달한 '수출 100억불의 날' 본지 1면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자립경제 새 출발점에… 전진의 발걸음 늦추지 말자." 2019년 한국은 총 5418억달러어치를 수출한 세계 7위 수출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