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늦가을 오후였다. 통화자는 조선일보 기자였고, 까치가 출간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리뷰하게 돼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명문(名文)의 서평이 조선일보 북스 지면에 실린 것이 우리 출판사가 과학책으로서는 보기 드문 17년여의 장기 스테디셀러를 가지게 된 계기였다.

그 인연으로 나는 자연히 조선일보의 기사와 칼럼들을 열심히 읽게 되었다. 글들의 길이는 장단이 있었으나, 대개는 내게 새로운 정보와 지식, 식견과 통찰을 주는 괄목할 것들이었다.

두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제법상 엄존하는 민족 현실에서 나는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경제 발전과 민주화가 균형을 이루며 동시적으로 진행된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깊이 생각해왔다. 따라서 그 역동적 균형이 깨진 현재, 국가의 존재 의미와 미래를 강하게 묻는 조선일보의 기사와 글들을 더욱 정독하게 되었다.

근자에도 '포퓰리즘에 무너지는 나라'라는 '조선일보 100년 기획' 기사를 나는 관심 깊게 읽었다. 그 첫 기획인 폴란드 기사는 쇠망하는 그 나라의 전모를 소상히 전했다. 그 후속 격인 '폴란드는 밥통을 깨진 않는다'는 제목의 특파원 칼럼은 기획기사를 보완하는 동시에 우리나라 현상의 반면교사가 된 글이었다. 내가 평소 기자 칼럼을 챙겨 읽는 보람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비관적인 뉴스가 많은 일반 지면들보다 문화면을 열독했다. 매일 아침 문화면을 펼치면 나는 희망과 기쁨의 열창을 듣는다. 칠팔 년 동안 극장에 간 적이 없었는데, 영화 '기생충'을 심층 보도하는 문화면 기사들을 읽고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문화부의 그런 역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1938년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영화사 최초의 영화제를 기획하여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위로한 조선일보 문화부의 정신과 힘, 역사와 현실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지난 6월 14일 별세한 박종만 까치글방 창립자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보내온 유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