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거대한 아동 성매매 지하 조직이 있다. 사탄을 숭배하는 그들은 회춘을 위해 아이들의 피도 뽑아 먹는다. 이 조직을 이끄는 건 민주당과 소위 글로벌 엘리트로,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조지 소로스가 핵심이다. 이 범죄 조직을 깨부수러 나선 외로운 영웅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이다."
이런 음모론이 11월 대선과 상·하원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 확산돼 비상이 걸렸다. 이 음모론과 그 추종자들은 '큐어난(QAnon)'으로 불린다. 'Q'라는 이니셜을 가진 트럼프 정부 익명의(Anonymous) 고위 인사'라는 뜻이다. 2017년 한 극우 사이트에서 이 음모론을 처음 주창한 이의 아이디에서 따왔다고 한다.
큐어난은 '민주당은 아동 성매매 조직'이란 설정을 근간으로 새로운 음모론을 덧붙여간다. 요즘 화두는 "코로나는 트럼프 재선을 막으려 민주당이 뿌린 바이러스"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시위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는 살아있고, 유대계 큰손 조지 소로스가 시위 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동 성매매 수뇌부로 민주당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앤서니 파우치 박사 같은 관료 집단, 배우 톰 행크스,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라이 라마까지 지목한다.
큐어난은 "트럼프를 믿는 신흥 종교"(시사지 애틀랜틱)란 말이 나올 정도로 트럼프를 우상화한다. 이들은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시'와 '암호'로 본다. 트럼프가 숫자 '17'을 말하면 알파벳의 열일곱째 글자 'Q'를 인정했다고 열광하고, 그가 분홍 넥타이를 매면 일부 병원의 아동 코드가 '핑크'임에 착안해 "아동 성매매 집단을 공격하라는 지령"으로 읽는다.
큐어난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트위터에 관련 계정이 15만건, 페이스북에 10만건이 있었기 때문에 추종 인원은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3월 이래 페이스북에서만 큐어난 추종자가 6배 늘었다"고 했다. 코로나가 확산하고 트럼프의 지지율이 급락하던 무렵이다.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5월 큐어난을 "특수 이념을 신봉하는 반(反)체제 성격의 정치 음모론"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테러 위협을 주시한다고 밝혔다. FBI는 최근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살인 미수 등 10여건의 범죄 시도가 큐어난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자 페이스북은 19일(현지 시각) 큐어난 관련 계정 수천 개를 '가짜 정보와 폭력 선동'을 이유로 삭제했다고 밝혔다. 트위터도 큐어난 계정 7000개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한발 늦었다는 지적이다. 이미 큐어난 추종자들이 제도권 정치로 진출하고 있다. 큐어난을 표방한 인사 67명이 오는 상·하원 선거에 집권당인 공화당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이 중 마저리 데일리 그린(조지아), 로라 루머(플로리다) 등이 최근 공화당 하원의원 후보 티켓을 따냈다. 공화당은 딱히 제재를 하지 않았고, 트럼프 캠프 인사들과 트럼프의 차남 에릭 등이 큐어난 후보들을 측면 지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처음 큐어난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사실상 공인을 해줘 논란이 됐다. 그는 백악관 브리핑에서 '큐어난의 확대를 어떻게 보느냐'는 기자 질문에 "잘 모르긴 하지만 그들이 날 굉장히 좋아해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들은 폭력 시위에 분노해 일어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트럼프는 '아동 성매매 조직에서 미국을 구한다는 주장을 믿는다는 거냐'는 질문엔 "내가 급진 좌파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큐어난은 오늘 엄청난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라며 "위험한 음모론과 선을 그어야 할 대통령이, 지지층을 투표소로 끌어낼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했다.
☞큐어난(QAnon)
미국 민주당 중심 세력이 산업과 언론을 장악해 미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지지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음모론을 처음 제기한 이의 이니셜 '큐(Q)'와 익명(anonymous)이라는 뜻의 '어난(Anon)'을 합쳐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