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선 할머니 웨딩드레스를 손녀가 입거나, 어머니 드레스를 딸이 입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검소하다고 볼 수도 있고, 가풍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 할머니의 ‘추억’까지 함께 입는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68)의 손끝은 얼마 전 화제가 된 결혼식 기사로 향했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의 신부가 시어머니 김영명 재단법인 예올 이사장이 40년 전에 입은 웨딩드레스를 고쳐 입고 식을 올린 내용이다. 김영명 이사장의 두 딸인 정남이·정선이씨도 같은 드레스를 수선해 입고 결혼식을 올린 바 있다.
그 드레스가 바로 이광희 작품이다. 신부 몸에 맞게 수선한 것도 일일이 그녀 손을 거쳤다. “전적으로 신부의 선택이었죠. ‘다른 디자이너들 드레스도 아름다우니 시도해보라’고 권했는데 세계적으로 이름난 디자이너들 의상까지 두루 보고 오더니 ‘어머님 드레스가 가장 우아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외려 걱정을 한 건 김영명 이사장 쪽. 그러나 우려와 달리 드레스 대물림에 “멋지다”는 댓글이 잇따랐다.
이광희 디자이너는 리폼이라고 해서 새 드레스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스커트 폭은 페티코트로 조정할 수 있고, 안감에 레이스를 덧대 길이를 마음껏 늘일 수도 있지요. 이번 드레스는 색상이나 레이스 패턴이 원래 의상과 좀 달랐는데도 겹쳐 이으니 굉장히 화려해졌어요.” 사이즈 때문에 원단을 이은 표가 난다 싶으면 꽃 장식이나 각종 비즈(구슬)로 꾸미면 감쪽같다고도 했다. “빌려 입는 것도 정말 비싸잖아요. ‘작은 결혼식’에 이어 옛날 의상을 고쳐 입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디자이너는 사실 올해를 '안식년'이라고 선언했었다. 2009년부터 10년 넘게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의 주민을 돕는 NGO '희망의망고나무'(희망고) 때문으로, 올해는 현지에서 주로 머물 생각이었다. "10년 전 100그루 심었던 망고나무가 지금 4만 그루나 됐지요. 지난해엔 톤즈에 있는 한센인 마을 주민들이 기거할 건물까지 완공했거든요. 거의 4년 넘게 걸린 프로젝트입니다." 언제나 응원해주던 남편(홍성태 한양대 교수)조차도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무릎 수술 후 목발을 짚은 채로 현장을 누볐다는 그다. "누군가 한센인 마을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까진 힘들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사진 속 한센인들이 제 가슴 속에 팍팍 안겨와요. 아침부터 눈물이 쏟아지는데, 그날로 한센인 마을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맑은 눈빛의 아이들이 '마마 리'하면서 따라오는데, 그걸 어떻게 물리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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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현지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톤즈 아이들과 사진과 편지를 나누는 걸로 대신하고 있다. 전쟁고아 수천 명을 돌봤던 부모님의 DNA를 닮은 것 같다고도 했다. 아버지 고(故) 이준묵 목사는 1953년 ‘해남등대원’을 설립해 50년 넘게 고아를 돌보며 가르쳤고, 간호사 출신이었던 어머니 고(故) 김수덕 여사 역시 고아와 나병 환자를 돌보며 평생을 바쳤다.
“톤즈에 눈뜨게 해준 배우 김혜자 선생님께서 ‘희망고 활동을 잘하려면 패션 일을 더 잘해야 한다’ 조언하셨지요. 제 업(業)에 충실해야 소명감 있게 봉사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고, 힘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죠. 이제 패션으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이광희의 희망은 앞으로도 고(go)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