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0년대 중후반 냉전시대를 끝내고 핵무기를 줄이는 군축협상을 이끌었다. 두 사람은 제네바에서, 레이캬비크에서, 워싱턴에서 여러 번 정상회담을 했는데, 그 복잡하고 어려운 회담 중에도 좌중을 웃기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소련도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됐습니다. 크렘린궁 앞에서 ‘레이건은 개망나니다’ 하고 소리쳐도 경찰이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레이건이 맞받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요. 백악관 앞에서 ‘레이건은 개돼지다’ 하고 고함쳐도 경찰이 본체만체 한다오." 물론 레이건이 말한 표현의 자유가 진짜 표현의 자유다. 크렘린 궁 앞에서 미국 대통령 욕을 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는가, 백악관 앞에서 미국 대통령을 마음껏 욕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표현의 자유라는 뜻이다.
올해 일흔한 살 고영주 변호사, 이 분은 경기고등학교 나왔고, 서울 공대 출신이다. 그런데 뜻한바 있어 사법시험을 봤고, 검사로만 30여년을 봉직했다. 2010년 ‘친북·반국가 행위 인명사전’을 편찬했고, 2011년엔 민노당 해산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2015년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됐다. 그런데 고영주 변호사는 2013년1월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해 "그는 부림사건 변호인으로서 공산주의자다" 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부림사건’이란 1981년 부산지역에서 22명이 독서모임을 가졌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중형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고영주 변호사였고, 훨씬 나중에 재심을 맡아 무죄로 이끈 변호사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고영주 변호사는 7년 전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했고,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명예훼손에 대해 무죄로 판결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평가한 여러 이유를 제시하며 본인만의 진단을 내린 것으로 악의적 모함이 아니다." "‘공산주의자’의 개념도 시대마다 달라 허위 사실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어제 2심 판결에어서 뒤집어졌다. 어제 서울중앙지법 형사9부 최한돈 판사는 고영주 변호사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즉 유죄를 선고했다. 물론 고영주 변호사는 즉각 대법원까지 갈 것 같다.
재판장인 최한돈 부장판사는 진보적 판사들의 모임인 국제인권법 연구회 소속으로 법원 내에서도 강성 진보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 문제를 끄집어낼 생각은 없다. 그의 과거가 어떻든,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김광일의 입’은 오로지 판결만 갖고 말하겠다. 2심 재판부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이다." "표현의 자유 범위를 벗어난다."
그런데 이런 판결 이유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을 명예훼손의 ‘피해자’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해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2011년 대법원 판례(MBC 관련)는 고 못 박아 말하고 있다. 2016년 대법원 판례(전남 고흥군 관련)에서도 이렇게 밝혔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국민에 대한 관계에서 형법의 수단을 통해 보호되는 외부적 명예의 주체가 될 수는 없고, 따라서 명예훼손죄나 모욕죄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가. ‘대통령’이란 직책은 헌법에 명시된 대표적인 국가기관이다. 대법원 판례는 대통령은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명예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서울중앙지법 2심 재판부는 무슨 근거로 문 대통령을 명예훼손의 주체로 봤고, 피해자로 본 것인지 말해주기 바란다.
또한 최한돈 판사와 2심 재판부는 고영주 변호사가 "(문 대통령)의 사회적 평가를 저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넘어섰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틀려 있다. 서로 말이 안 되는 ‘형용 모순’이다. 사회적 평가와 무관하게 개인적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심 재판부의 말을 빌려서 거꾸로 되받아보자면 "사회적 평가마저 저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미국 시민 중에 레이건을 존경하는 사람이 90%가 넘는다고 하더라도 ‘레이건은 개망나니다’라고 개인의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민주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48%이더라도 "나는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본다", 라는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곧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2심 재판부는 아직도 못 알아듣겠는가. 당신들은 "사회적 평가를 저해해서 표현의 자유를 넘어섰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수 있어야 그것이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다. 당신들은 그 짧은 표현 속에서 앞뒤가 충돌하는 논리적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 왜 그럴까. 그렇다. 법리, 즉 법의 논리에 맞지 않고 크게 어긋나는 판결을 하고 난 뒤 나름대로 그것을 해명하려다 보니 앞뒤가 꼬여버리는 것이다. 모르겠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겠다. 2심 재판부 당신들은 문 대통령에게 ‘사회적 평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판결을 했다. 그렇다면 묻는다. 사법부가 생각하는 문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무엇인가.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어디 법률에 나와 있는가, 아니면 ‘인권법연구회’ 출신 판사들만 돌려보는 내부 문건이라도 있는가. 혹시 "코로나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대통령"이란 식의 용비어천가가 지금의 문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평가라는 뜻인가. 공영방송에서 대통령을 찬양하면 ‘사회적 평가’이고, 조·중·동 신문이 비판하면 ‘명예훼손’의 소지가 높아 보이는 것인가.
이참에 사법부에 부탁한다. 대통령에 대해 어떤 말이 ‘명예훼손’이고 어떤 말은 ‘사회적 평가’인지 예시문(例示文) 리스트를 만들어서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공표해주기 바란다.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다", 이것은 명예훼손이라니, 그렇다면 "대통령은 무능하다", 이것은 어느 쪽인가. 정말 궁금하다.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대통령은 정신분열적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발 안 하는가. 이건 명예훼손 아닌가. ‘정신분열이다’, 하면 명예훼손이고, ‘정신분열적이다’, 하면 괜찮은가. 조원진 전 의원이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면서 "정신없는 인간"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고발은 당했으나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했다. 자, 이 표현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정신없는 인간’라는 말이 ‘공산주의자’라는 말보다 더 심하게 사회적 평가를 저해하고 있다고 보는데, 사법부 판단은 어떤가.
동서독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는 자신을 "바보"라고 욕을 하는 시민에 대해 기자가 "명예훼손이 아니냐"고 묻자 콜은 "아니다. 국가기밀 누설죄다", 라고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고 웃어넘겼다는 일화도 있다. 레이건·고르바초프의 농담과 정반대로 이제 우리는 평양에 가서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 그렇게 소리치면 안 잡아가는데, 서울에서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 그렇게 말하면 유죄가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