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당군(唐軍)을 지휘하고 지금 이 아프가니스탄의 북방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정(西征)을 한 것은 징기스칸이 그 길을 서정했던 시대보다 근 500년이나 앞선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문명의 척도랄 종이 하나 못 만들고 있었던 것을 심각하게 기억해야 될 줄 안다.”(‘서역삼만리’ 첫 회)
1974년, 한국 최초의 실크로드 횡단 르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서역삼만리(西域三萬里)’였다. 창간 기념일인 3월 5일부터 7월 20일까지 4개월 동안 모두 21회의 르포가 매회 2면씩 펼쳐지며 지면을 장식했다. 1980년 4월 일본 NHK가 방송하기 시작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보다도 6년이나 앞선 기획이었다.
편집부국장 이규태, 사진부 최영호, 사회부 이영덕으로 꾸려진 조선일보 취재팀은 2월 14일 출국해 36일 만인 3월 21일 귀국했다. 아직 변변한 교통편도 없던 유라시아 대륙의 안쪽 실크로드는 세계인 대부분에게 미답(未踏)의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냉전 시대였던 당시엔 중국과 소련에 한국인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취재진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험준한 고지대를 가로질러 터키까지 이르는 남쪽 길을 택했다. 지금도 쉽게 갈 수 없는 위험 지역이었다. 취재팀은 기름이 떨어져 사막 한가운데서 6시간 동안 갇히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시리즈는 1970년대 초·중반 조선일보 지면에 화려하게 등장한 ‘세계 10대 컬러 기행’의 하나였다. ‘신(新)왕오천축국전’(1970.6.21~8.23) ‘전란 속의 성지 순례’(1970.9.20~11.26)에 이은 이규태의 세 번째 작품. 당시 이규태는 이 취재의 의의에 대해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로 좁혀지고 거기에 따라 국민성이 점점 더 폐쇄적이 돼가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 조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취재팀의 눈에 들어온 실크로드는 결코 ‘타인의 길’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 칸의 길일 뿐 아니라 신라의 혜초, 고구려의 고선지가 넘었던 길이기도 했다. 포로로 잡힌 고선지 장군의 부하 가운데 훌륭한 제지 기술자가 제지술을 전파해 유럽 문명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혜초 스님이 보여준 신라의 개척 정신이 길에 스며들어 있음을 강조했다. “스님은 힌두쿠시의 험한 빙산맥(氷山脈)을 혼자 넘어 이 이교도의 황량한 동토(凍土)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독실한 신앙인이기 이전에 모험과 개척에 활달했던 신라 프론티어십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시리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훗날(2001년) 탈레반의 공격으로 파괴되는 바미얀 대불(大佛)을 취재한 3월 23일 자 기사다. 취재팀은 높이 53m와 37m의 두 불상이 이루는 장관 앞에서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생경함만이 어떤 섬세하고 간사한 표현의 수단 없이 직관적으로 압도시키는 매력을 지녔다”고 썼다. 히피 시즌이 되면 인근의 수많은 동굴에 백인 장발족들이 들어가 산다고도 기록했다.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들어간 취재팀은 팔레비 왕 치하의 테헤란과 옛 도시들을 거쳐 페르시아의 전성기에 ‘세계의 절반’이라 불렸던 푸른 도시 에스파한,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화장터와 다리우스 대왕의 무덤을 지났다. 터키에서 성경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라라트산, ‘일리아드’의 배경인 고대도시 트로이 등을 거쳐 간 긴 여정은 이스탄불에서 끝을 맺었다. ‘서역삼만리’를 비롯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획물들은 대한민국 언론이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로 달려가는 디딤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