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50여 년 전인 1960년대 초 우리 사회의 현실은 참담했다. 전란 뒤 폐허와 빈곤이 여전히 서민의 삶을 옭아매던 시절, 조선일보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와 그늘진 곳 우리 이웃의 삶에 주목하는 기획과 연재를 잇따라 선보였다. 방방곡곡 기자들이 발품을 팔고 직접 사진을 찍어 보도한,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당대 보통 사람들의 사연이 그 안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물에 굶주린 ‘물통의 밀림(密林)’ 수백미터. 손가락 하나 굽혀 놓은 듯한 수도꼭지 하나에 홍제동·현저동 일대 2000여 세대 1만여 목숨이 얽매여 있다. 통행 금지만 풀리면 물통이 열짓는 무학재 고갯마루, 아침 설겆이 끝에 가져다 놓은 물통을 이제야 가져간다고 석양을 등진 한 노파가 말해주었다….”
1963년 2월 조선일보 사회면 연재 ‘한국의 장글(정글)’ 제3회는 “서울은 수도꼭지 하나 없는 동이 50개, 공동 수도 수는 1767개. 290만 인구의 약 5분의 4가 물에 굶주린 ‘200만의 밀림’”이라고 썼다. 이 시리즈가 사회문제를 짚는 방식은 기발했다. 첫 회 제목은 ‘우체부도 길을 잃는 현저동 번지 밀림’. 서울 금호동 산10번지에 1만호 등 수만~수천 호가 한 주소를 쓰는 일이 흔하던 때의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를 못 면하는 번지 밀림” 이야기였다. 이 시리즈는 아이들이 넘쳐 한 교실에 두 학급이 등 맞대고 앉아 ‘38선 수업’을 하는 “교실 밀림”, 투기꾼 북적대는 명동 증시는 “벼락부자에 벼락거지도 낳는 돈나무 숲” 등의 개선을 촉구했다.
군사정부는 영농 자금 방출이니 재건 국민 운동 같은 여러 시책을 내놓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화려한 말잔치 뒤에 가린 서민들 팍팍한 삶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한 해 전인 1962년 3월 시작한 석간 사회면 연재 ‘하나의 현실: 춘신천리(春信千里)’는 이 시기 르포 기사 중 단연 돋보인다. 2회 ‘어엿한 살림꾼, 두메의 10대’는 경남 산청 지리산 산골 열 살 소년 이야기였다. 소년은 학교가 끝난 뒤 고구마 점심이라도 입 하나 덜 요량으로 논두렁에 나가 개구리알을 모았다. 신경통에 좋다는 개구리알을 모아 읍내 장터에 가져가면 동생들까지 여섯 식구 먹을 겉보리 몇 되로 바꿔올 수 있었다. 전쟁통에 공비에게 외아들을 잃은 칠순 형을 부양하는 동생, 석화 따러 나가던 나룻배가 뒤집혀 아내와 열두 살 딸아이가 횡사한 뒤 여덟 달 막둥이를 안고 울던 아빠 이야기 등이 이 연재에 담겼다.
이 시기 조선일보는 ‘희망을 걸고’ ‘앞으로 뒤로’ ‘섬에서 섬으로: 도서 어촌 실태 보고’ 등 다양한 형식과 기획의 르포 기사로 그늘진 서민의 삶을 비췄다. 이 같은 전통은 훗날 1990~2000년대 사회면 고정 코너 ‘길’, 2004년 ‘우리 이웃’ 시리즈로 이어졌다.
특히 2003년 세밑 ‘당신의 작은 사랑이 겨울을 녹입니다’라는 1면 사고로 시작된 ‘우리 이웃’ 기획은 2004년 연중 캠페인이 돼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데웠다. 경기 침체 속에 실업자가 늘고 빈부 갈등이 고조되는 현실을 극복하려 신문이 먼저 깃발을 든 기획이었다. 30단체가 주도하는 ‘우리이웃네트워크’가 출범했고, 지하방 환풍기 설치 등 10대 프로젝트가 선포됐다. 30만 결식 아동에게 밥을 먹일 ‘키즈뱅크’ 설립, 가리봉동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 개원이 이어졌다. 연말·연초 광화문 일대를 자선의 빛으로 물들인 ‘루미나리에’에는 48일간 관람객 1000만명이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