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시대가 관대함을 낳은 것일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고, 친구들과 모여 마음껏 웃을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시간에 패션은 위로라도 해주고픈 것 같다. 입기만 해도 ‘패알못’ (패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불렸을 법한 일명 ‘배바지’ 스타일이 올봄 최고의 패션 스타일로 꼽히기 때문이다. 허리선을 위로 올려 일종의 착시를 일으키는 하이 웨이스트(높은 허리선) 패션 중에서도 극단을 향한 ‘슈퍼 하이웨이스트 팬츠 패션’이다. 두렵지만 설렘으로 다가왔던 Y2K(2000년대) 복고풍 패션의 상징 중 하나가 로우 라이즈(허리선이 낮은) 패션이라면 이젠 그 복고풍 스타일을 역으로 맞받아친 것이다.
최고의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모델이 런웨이에서 소화해냈으니 패션계에 또 다른 도발을 일으키는 현상처럼 보이긴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미 우리에겐 어느 정도 익숙한 풍경이다. ‘배바지’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 바지 허리선은 벨트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요즘의 수은주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예측 불가다. 가슴팍에 마치 안전벨트처럼 고정돼 있는 모습은, 혼을 끌어올린 투자가 실패한 이들을 위해 바지라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허전한 마음에 버클을 잠가보려는 은유 같기도 하다. 그래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한 것일까.
‘배바지’가 넉넉한 어감 때문이지, 사실 영화 ‘킹스맨’ 등을 보면 전통 영국식 정장이나 고풍스러운 미국식 슈트 바지를 보면 바지 선이 상당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격식에 시대정신을 불어넣거나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숙명. 극단적인 로우 라이즈 팬츠 패션으로 ‘잘 팔리는 패션’의 명성까지 얻었던 프라다는 지난 2023년 가을·겨울 여성복 컬렉션에서 하이 웨이스트 팬츠를 선보이며 극은 극으로 통한다는 걸 예시했다.
하이 웨이스트 패션으로 특히 각광받은 건 영국 출신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이 이끄는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 그가 선보인 이번 2024년 봄·여름 남성 여성 쇼 모두 바지 길이가 가슴 바로 아래까지 가파르게 올라가는 등 비율을 더욱 확장했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익숙하지만 약간은 파격적인 스타일을 좋아한다”면서 “하이 웨이스트 팬츠는 구속과 해방 사이의 긴장감, 꽉 조이는 것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관능미가 있다”고 밝혔다. 무조건 길게 끌어올린 듯 하지만 이것도 인체공학적인 법칙이 필요했다. 시선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최적의 비율을 구현하기 위해 보통 허리선보다 9cm 높게 재단됐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내부에 고정력이 있는 뷔스티에를 넣었다. 몸에 맞지 않는 벙벙한 치수의 옷을 사서 끌어올린 것이 아닌, 체형에 맞추면서도 탄탄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했다.
로에베를 비롯해 릭 오웬스, 드리스 반 노튼, 알라이야, 오피신 제네랄 등도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조용한 럭셔리’의 대명사 에르메스와 ‘실루엣의 상징’ 생 로랑도 매우 짧은 팬츠를 선보이면서 허리 선을 높이기도 했다. 젊은 층이 좋아하는 아크네 스튜디오도 로우 라이즈 패션을 대거 내세우면서도, 라운지 웨어 같은 편한 스타일의 의상은 외려 하이 웨이스트 패션을 선보였다. 모양은 잡아주면서 로우 라이즈 팬츠류처럼 허리를 옥죄지 않아 밥 먹을 때마다 남 몰래 바지 버튼이나 벨트 버클을 풀어놓는 수고도 덜게 됐다. 누군가 당신에게 ‘패알못’이라고 손가락질했다면 당당하게 말해보라. “네가 패션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