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순간, 오르막을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게으른 성향을 타고 나는 듯하다. 오죽하면 인류의 발전은 게으름 덕분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게다가 문을 열면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이들의 상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학교, 직장, 모임들. 불편한 마음이 몸을 쉬이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매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조차도 이럴진대, 최근의 나날들은 매우 힘들고 괴롭기만 했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길에는 언덕이 있는 만큼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은 그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심코 내밀어 준 동행 걷기대회 링크였지만 내게는 큰 의미가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몸에게 세상은 사인 코사인 그래프 같은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지난 주말, 낮 시간의 일정을 모두 털어내었다. 걷기 위해서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10km, 20km를 최대한 빨리 걸으면서 시간 대비 운동 효율을 높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걷고 싶었다. 몸에게 시간의 흐름과 신체의 변화를 ‘천천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힘든 시간을 걷고 있는 이 녀석에게 곧 힘든 시간도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행’이었다. 혼자 걷는다면 수월하게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는 거리인 5km였지만, 짝꿍과 함께 긴 시간을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코스는 어디가 좋을까.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역시 인생의 굴곡을 적당히 맛보게 해 줄 만한 곳은 집으로 향하는 길인 종로에서 무악재를 지나 연희동으로 돌아가는 길목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적합한 도시는 결코 아니다. 파리나 도쿄, 런던 같은 대도시는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다. 산업 혁명과 교통의 발달로 도시가 크게 확장되는 동안에도 문제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서울은 달랐다.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중심부에는 남산이 크게 솟아 있고 한강 이남에는 청계산과 관악산, 우면산에 이르는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좋게 생각하면 천혜의 요새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확장의 관점으로 서울을 바라보면 결코 효율적인 확장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산을 오르고, 피하고, 곁에 두고 함께 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무악재는 산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고갯길’에 지나지 않았지만, 구두를 신고 천천히 은행잎을 밟으며 언덕을 오르고 다시 내리막을 걷는 ‘감각’을 일깨워 주기에는 초보 하이커에게는 나쁘지 않은 코스니까. 바로 옆 통일로로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수천 대의 차량들이 내뿜는 가스는 역시 친해지기 어렵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 매일 걷다시피 하는 홍제천에서 편안하게 코스를 끝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광화문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 일정을 고려하는 바람에 둘 다 걷기에 불편한 신발을 신고 온 것은 큰 실수였다. 구두를 신은 나는 그렇다 치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온 짝꿍이 문제였다. 하지만 일정을 따로 빼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기에 우리는 이 상태로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이 쉽게 피곤해질 수 있는 상황. 이 역시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을 지날 때까지는 그래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상 징후는 문제가 조금씩 쌓여 나타나는 법이다. 독립문역 근처에 도착하자 슬슬 족저근막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짝꿍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신은 구두는 바닥에 패드조차 없는, 집에 있는 신발 중 가장 딱딱하기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코스가 코스이니만큼 주변에는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이 널려 있다. 정말이기 포기하기 쉬운 공간이었다. 굳이 걷기를 꼭 오늘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증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정말 별것 아닌 순간의 별것 아닌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기 싫었다. 그동안 어렵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걸어온 인생이었다. 더 이상 포기를 거듭하면 스스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짝꿍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0년을 묵묵히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온 친구였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원하는 친구였다. 새로운 출발을 할 때는 ‘이 길이 아니다’싶으면 바로 발을 빼는 것이 좋다.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짝꿍에게는 한번 시작하려고 마음먹으면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작년의 12시간 두타산 산행이 생각났다.
산행 초보였던 짝꿍이 아버지를 무심코 따라갔다가 조난 직전까지 갔었던 이야기. 도중 하산할 수 있는 타이밍이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멈추지 않았던 근성. 5km 남짓한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했지만 그것조차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걷기를 중단할 만큼 긴 거리는 아니라고 독려했던 탓(?)도 조금은 있었다). 동행하는 이를 배려하기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했던 그 모습에 나는 한 번 더 반했는지도 모른다.
언덕은 어렵지 않았다. 다리 근육은 전혀 힘들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순간은 무악재에서 홍제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울퉁불퉁하게 잘 정비되지 않은 보도블록 위를 패드 없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 것은 족저근막에 염증이 생기면 어쩌나 할 정도의 고통을 불러오는 행위였다. 추운 날씨는 발바닥의 모세혈관에 충분한 혈액을 공급하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발바닥의 통증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길이 잘 든 운동화를 신고 오기만 했었더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난다. 실제로는 언덕을 오르면서 힘든 기분을 느끼고자 시작했던 걷기였는데, 실상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몸에 힘을 빼고 걸어도 상관없었던 내리막이었다. 심지어 발바닥 통증을 줄이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다리에 힘을 더 주고 걸어야 했다.
이렇게나 인생은 알기 쉬우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길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집까지 가는 길을 고작 1km도 채 남기지 않고, “우리 지금 여기서 택시 타면 안 될까?”라든지 “지금이라도 옆에 있는 킥보드 타고 가자”라며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던 걸 생각하면 힘들고 괴로운 순간엔 실없는 농담만한 처방약도 없는 듯하다. 빠르게 지나왔을 거리를 몇 번을 쉬어 가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과 충분히 나누면서 살고 있을까?
혼자서 걸었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걸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닥치는 것.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인생이다. 보험을 들고 예금을 하고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시각장애인이 막대기로 바닥을 짚는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맨몸으로 다가오는 내일을, 다음 달을, 내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역경이나 고통도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걷는 동안에 그 역경도 고통도 지나고 나면 잊힌다. 과정을 함께 한 사람과 나누었던 정은 남는다. 그것이 ‘동행’이 주는 삶의 큰 행복 중의 하나가 아닐까.
순간순간 준비되지 않은 채 맞닥뜨리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힘에 부친다고 해서 마주하기 싫다고 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다면 괴로운 순간을 지난 후 나에게 남은 것은 일그러진 얼굴뿐일 것이다.
웃으며 걷자.
그리고 그 웃는 얼굴을 함께하는 소중한 ‘동행’들에게 보여주자.
그러고 나면 따뜻한 침대 안에서 고생한 족저근막을 손으로 가볍게 주무르면서 힘든 순간도 거뜬히 해낸 자신을 조금은 더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