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서 학예사가 목판을 관리하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은 고서·고문서·목판 등 60만여 점의 국학자료를 보유한 국내 최다 민간 기록자료 소장기관이다. /김동환 기자

안동호(湖)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의 한 산자락. 이곳은 기와지붕을 이은 건물이 계단식으로 잇따라 들어선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둥지를 튼 곳이다. 풍수를 전혀 모르는 이도 이곳에 서면 산세와 주변 풍광이 뛰어나 안동이 예로부터 인품과 학식이 높은 선비들의 고장으로 이름난 이유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우리나라 대표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도 이 근처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지난 17일 오후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와 함께 유교문화박물관 1층에 마련된 수장고(收藏庫)의 출입문을 열자 350여㎡(107평) 실내에선 마스크와 장갑, 흰색 가운을 갖춘 학예사 2명이 고문헌 변질 여부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30도를 웃도는 습한 외부 날씨에도 수장고 내부의 디지털온도계는 50% 습도에 20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국학자료 30만점이 보관된 이곳은 종이가 대부분인 기록문화재의 특성상 귀중한 자료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최첨단 시설로 설계됐다. 문소라(36) 학예사는 “화재가 발생할 경우 자동으로 분출되는 소화가스는 자료에 영향을 주지 않는 환경 친화적인 물질을 사용한다”며 “외기 도입형 환기시스템을 구축해 국학 자료를 보관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개방형 수장고에서 관람객들이 목판을 관람하고 있다.
17일 오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개방형 수장고에서 관람객들이 목판을 관람하고 있다.

◇문체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운영된 국학자료 기탁제도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 이바지를 위해 1995년 12월 비영리재단법인으로 설립된 한국국학진흥원은 사라질 위기의 민간 소장 국학자료를 수집해 연구·보존하는 경북도 산하 기관이다. 개인이 꽁꽁 싸매고 있어 보존이 어려운 국학자료를 가능한 한 빨리 발굴해 연구한 결과를 대중화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이곳에선 2002년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국학자료 기탁관리제’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이나 문중, 향교, 서원 등에서 보관 중인 국학자료를 기탁 받아 보존과 관리, 연구를 담당한다. 우리나라 역사와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소중한 기탁 자료의 훼손이나 도난 우려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장자 입장에선 비용 없이 든든한 보관 창고와 경비원을 동시에 확보한 셈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전체 연간 예산은 450억원이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251억원을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 경북도와 안동시도 운영비 72억원을 보태는 등 한국국학진흥원의 운영과 역할에 맞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현실세계와 같은 사회·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 가상세계를 일컫는 ‘메타버스 수도, 경북’을 내세운 경북도는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국학 연구에서 벗어나 국학자료의 디지털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6월 시작한 국학자료의 국역과 대중화를 위한 메타버스 가상서원 구축을 위한 전통 기록물 해독 사업, 민간 기록자료 수장시스템 체계화 및 효율화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괄목할 성과 내는 한국국학진흥원

고서를 관리하고 있는 학예사들.

한국국학진흥원이 고문서·책·목판 등 국학자료를 수집한 양은 18일 기준 60만 1287점으로 집계됐다. 한국국학진흥원은 국내에 산재한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2015년에 ‘한국의 유교책판’에 이어 2017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각각 등재됐다. 여기에다 2016년에는 ‘한국의 편액’과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해마다 국학자료를 꾸준히 수집해 온 한국국학진흥원은 이제 국내 최다 기록유산 보유기관이 됐다. 이와 유사한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경우 8월 현재 왕실 도서와 고문헌 등 18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에는 고문서·목판 등 25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이처럼 많은 양의 국학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지역에 기반을 둔 탄탄한 네트워크와 소장자의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기탁제도 덕분이다. 유교문화의 뼈대를 이루는 문중과 지속적인 교류 및 소통, 설득이 기반이 돼 국내 최다 기록유산 보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현재 전국 1134곳의 문중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한국국학진흥원이 올해 국학자료 60만 점을 돌파한 계기는 지난 6월 경북 경산시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66) 목사가 국학자료 1만1000여 점을 기탁한 이후였다. 조 목사가 기탁한 자료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실상과 당시 민중의 삶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 목사는 독립운동가 해창 조병국(趙柄國· 1883~1954)의 손자이다. 조병국은 1919년 3·1 운동 당시 경북 청송 화목장터에서 조현욱(趙炫郁), 신태휴(申泰烋)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공적이 인정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기탁자료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근대 문서와 당시 작성된 필사본 일기류이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당대 민중의 삶이 생동감 있게 담겨 있다. 조원경 목사는 “독립을 위해 활약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한국 근대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랜 시간 간직한 자료를 선뜻 기탁했다”고 밝혔다.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 본부장은 “개인과 문중에서 기탁한 국학자료에는 저마다 사연이 녹여져 있다. 일부 기탁자의 경우 오랜 세월 보관한 자료에 애착이 들어서인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며 “이들이 기탁한 자료를 더욱 소중히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국학자료의 연구뿐만 아니라 유아에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참여할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프로그램 중 하나인 청년 선비 포럼은 21세기 급속한 문화변동을 겪고 있는 청년층을 대상으로 청렴과 절의, 변혁 의지로 무장한 조선시대 선비의 세계관과 철학을 소개하는 인문학 프로젝트이다. 일자리 창출에도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이 대표적이다. 삶의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여성 어르신들을 선발해 옛이야기와 선현 미담을 유아들에게 직접 들려주는 사업이다. 2009년 처음으로 30명을 선발한 이후 지난해 말 기준 3305명이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전국 8570곳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