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던져도 안 될 것 같은 날이 있다. 예닐곱 달 이어지는 긴 프로야구 정규 시즌 중 이런 경기가 드문드문 나온다. 지난 6일 부산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롯데의 경기. 두산 선발 김유성과 롯데 선발 터커 데이비슨이 초반부터 제구에 난조를 보이며 조기 강판했다. 뒤이어 나온 구원 투수들도 매한가지. 볼넷과 안타, 실점이 줄줄이 이어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혼전이 4시간 50분을 끌었다.
양 팀 똑같이 9명씩 18명 투수가 32안타 22볼넷을 허용했다. 이 난전(亂戰)에서 홀로 빛난 투수가 있었다.
지난해 프로야구 신인왕 두산 김택연(20). 이날 두산은 8회초 양석환 2점 홈런으로 7점을 몰아내며 14-12 극적인 역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8회말 고졸 신인 투수 홍민규가 다시 1사에 안타를 맞으며 위기가 엄습했다.
투수가 다 소진된 두산 덕아웃은 마무리 김택연을 조기에 등판시켰다. 이 혼탁한 분위기를 김택연은 묵직한 돌직구로 눌러버렸다. 후속 타자 정훈과 한태양을 뜬공으로 처리하고 9회 역시 소동 없이 제압했다. 4회부터 7회까지 계속된 실점 행진이 김택연 앞에서야 멈춰 섰다. 최종 점수는 15대12. 8회초까지 7-12로 밀리던 승부를 뒤집었다.
김택연은 시즌 4세이브를 거뒀다. 5경기에서 무실점. 평균자책점은 0이다. 이날 승리로 두산은 지난해 5월 26일부터 이어진 일요일 17연패도 벗어났다. 입단 때부터 유망주 대접을 받긴 했지만 고졸 신인 2년 차인 그가 이렇게까지 두각을 나타내리라 예상한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그는 고3이던 2023년 9월 대만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5연투를 하는 등 고교 시절 너무 많은 공을 던져 ‘프로에 오면 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지난해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며 신인왕에 오르긴 했지만 정규 시즌 60경기에서 65이닝을 던져 ‘고졸 선수로 너무 많이 나왔다’는 우려가 또 나왔다. 그런데 또 이런 우려를 씻어내면서 활약하고 있다. 이승엽 두산 감독은 “트레이닝 파트에서 관리를 잘했고 굉장히 영리한 선수”라면서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평가했다.
김택연은 이제 한국 프로야구 역사 최고 마무리 투수 삼성 오승환(통산 427세이브) 뒤를 이을 후계자 후보군(群) 중 선두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경쟁자로 꼽힌 KT 마무리 박영현(22)은 올 시즌 초반 난조를 보이고 있다. 벌써 3번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고 1패 2세이브 4.32. 홈런도 2방 맞았다.
오히려 신흥 주자로 한화 김서현(21)이 떠오르고 있다. 2023년 한화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한 그는 157㎞대 강속구를 장착해 주목받았다. 프로에 와서는 2년간 긴 침체기를 겪다 지난해 하반기 한화에 부임한 양상문 투수 코치를 만나면서 한 단계 질적 향상을 이뤘다.
올 시즌 중간 계투 필승조로 출발했지만 마무리 주현상이 초반 부진에 빠지자 김경문 감독은 김서현을 지난달 29일 KIA전부터 마무리로 발탁했고,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이날까지 7경기에 등판해 무실점 행진(2피안타 2사사구)을 이어가며 1홀드 2세이브. 김택연 못지않은 압도적 구위를 보여주고 있다.
8~10일 잠실에서 열리는 한화와 두산 3연전 볼거리 중 하나는 이 신흥 마무리 영건들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8일 첫 경기부터 두 마무리가 나란히 마운드에 올라 호투했다. 김택연은 양 팀이 5-5로 맞선 9회초 마운드에 올라 노시환과 문현빈을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10회에도 삼자 범퇴를 기록했다. 김서현도 9회말 무사 1루 위기에 올라와 희생 번트 이후 정수빈을 2루수 땅볼, 추재현을 헛스윙 스트라이크 낫 아웃으로 처리하며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이날 경기는 연장 11회말 두산이 김기연의 끝내기 결승타로 6대5 두산의 승리로 끝났다.
이 둘 외에도 지난해 매서운 투심을 장착하며 14세이브(4승 6패 4.35)를 달성, 키움 수호신으로 급부상한 주승우(25)도 조용히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주승우 역시 올 시즌 3경기에 등판해 2와 3분의 1이닝 무실점에 1승 2세이브. 도전장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올 시즌 구원왕 경쟁에서 터줏대감 격인 김재윤(삼성·1패 3세이브 12.60)과 정해영(KIA·1패 2세이브 6.75)이 주춤하는 사이, 젊은 투수들이 새롭게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