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요? 벌써 받았어요. 우승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이미 오빠가 다 사준걸요.” 약간 오글거리는 느낌의 ‘착한’ 답변을 들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듣게 될 반전(反轉)의 신호탄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했다.
9일 개막하는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 투어 KPGA 선수권을 앞두고 양지호(33)와 그의 아내 캐디 김유정(29)씨 부부가 궁금했다. 지난달 29일 KB금융 리브챔피언십에서 양지호는 코리안 투어 데뷔 15년째, 133경기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천신만고 끝에 우승한 남편 못지않게 아내 캐디도 유명해졌다. 아내 김씨는 당시 마지막 18번 홀에서 두 번째 샷으로 우드를 치겠다는 남편을 만류하고 안전하게 아이언으로 끊어가자고 설득하다 우드를 뺏다시피 백에 집어넣고 아이언을 건넨, 그 장면이 화제가 됐다. MZ 세대인 부부는 축하하는 팬들 앞에서 키스 세리머니도 했다. 아내 김씨가 “골프장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 늘었어요”라고 하자, 양지호는 “사실 유정이가 저보다 더 유명해졌어요”라며 껄껄 웃었다.
그런데 당시 왜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일까? “캐디백을 끌고 카트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우승 경쟁을 하던 선수가 17번 홀에서 타수를 잃었다는 팬들 말이 들렸어요.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었죠. 그렇다고 오빠에게 말하면 방해가 될 것 같고~. 마침 앞선 라운드에서 계속 끊어갔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고집을 부렸죠.”
양지호는 “경기가 끝나고서야 아내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우드 샷에 자신은 있었지만, 혹시라도 실수했다면 절호의 기회를 날릴 수도 있었다”며 “정말 아내가 우승의 일등 공신이었다”고 했다. 그 말은 들은 김씨가 “아직 캐디로서는 엉터리나 다름없다”고 하자 양지호가 “제가 그동안 역전패를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아내 덕분에 많이 좋아졌으니 내겐 최고의 캐디”라고 했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으로 2008년 코리안 투어에 데뷔한 양지호는 챔피언 조로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해 20위권 30위권으로 곤두박질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꾸 우승 기회를 놓치면서 울렁증이 생겼고, 불면증까지 겹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필드에 나서기 일쑤였다. 김씨와는 4년 전 군에서 제대하고 지인 소개로 만났다. 김씨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도 골프장에서 캐디 생활을 3년간 한 억척스러운 면이 있었다. 결혼 전부터 자연스럽게 캐디를 맡았다가 2020년 12월 아내 캐디가 됐다. 김씨는 경기 도중 남편이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면 반려견 룬다(이름을 양 이룬다로 짓고는 줄여서 룬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야기를 시작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펼친다고 한다.
그동안 괴롭혔던 불면증도 결혼하고 나서 언젠가 사라졌다. 양지호는 “생활 속 작은 기쁨들이 모여 불안감을 극복한 것 같다”며 “이번 우승으로 새 골프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시부모님은 아들 뒷바라지하는 며느리 캐디를 어떻게 생각할까? 김씨가 주저 없이 말했다.
“너무 예뻐해 주세요. 그래도 캐디는 올해까지만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오빠가 사실 6대 독자예요. 그러니까 전 6대 독자의…. 아무 말씀도 안 하시지만 슬슬 아이 생각을 해야죠.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