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학문화 작업에 반평생을 바쳐온 정수현(64·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9단이 곧 상아탑을 떠난다. 내년 2월 정년퇴직이지만 교단에서는 것은 오는 12월 2일 바둑교훈학 시간이 ‘마지막 수업’이다.
1997년 명지대가 바둑학과를 창설하면서 설계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연락해 왔다. 대국과 방송 등으로 바쁜 때여서 망설이다 전임을 사양하고 6개월 겸임 조건으로 수락했다. 처음 등장하는 학문이다 보니 커리큘럼·교재·강사진 등 모든 것이 막막했다. “6개월간 죽어라 하고 뛰어다녔더니 40대 초반에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 없었다.”
그는 당시 1류 대열에 속하는 승부사였다. 1986년 제1기 신왕전 우승을 비롯해 2기 연승최강전 준우승(93년) 등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국제 대회인 TV아시아선수권 한국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그에게 동료 기사들은 ‘정 교수’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바둑학과가 생기기 훨씬 전 얘기다.
진짜 ‘정 교수’가 된 정수현의 동분서주 속에 학과는 빠르게 자리 잡아 갔다. ‘예체능대학 체육학부 바둑지도학 전공’에서 이듬해 ‘예체능대학 바둑학과’로 독립했다. 20명이던 정원도 99년부터 30명으로 늘었다. 자신도 틈틈이 공부하며 고려대에서 심리학 석사, 교육학 박사 학위를 땄다.
정 교수는 바둑 학문화의 모티브를 국제 학술 교류에서 찾았다. 2001년 바둑 대회를 열려던 대학 측을 설득, 제1회 국제바둑학술대회로 바꿔 연 것이 대박을 쳤다. 용인 명지대 캠퍼스에서 치른 이 행사엔 20여 나라 관계자들이 참석, 한국이 바둑학 발상국이란 인식을 깊이 각인하는 계기가 됐다. 뒤이어 한국바둑학회가 2003년 창립됐다.
일본 센다이(仙臺) 국제 심포지엄 때의 일도 그 무렵 일화다. “한국에 바둑학과가 생겼다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자고 저를 초청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어요.” 그들은 한국이 세계 최강에 오른 비결을 물었다. “일본 바둑의 유미(唯美)주의 성향이 한국의 실재(實在)주의 패러다임에 무너진 것”이란 정 교수의 분석에 일본 관계자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라고 했다는 일화다.
정 교수는 학문으로서 바둑을 기술(技術)학, 문화학, 실용학 등 크게 3가지 특성으로 규정한다. 게임에만 머물던 바둑이 동양 문화의 정수(精髓)로, 인성 함양 등 교육 수단으로 격상된 과정에 바둑학의 가치와 역할이 녹아있다는 것. 저서가 50여 권에 이르는데도 “아직 연구해야 할 대상이 산처럼 쌓였다”고 했다.
2001년 첫 졸업생 이후 배출된 제자가 400명대를 헤아린다. 외국인 졸업생은 25명. 각국서 바둑 유학생들이 몰려오면서 바둑학과는 대표적 ‘다국적 군단’ 학과로 성장했다. 제자들이 행정, 인터넷, 방송 등 국내외 다양한 위치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정수현은 상당한 속기(速棋)다. 전광석화 같은 수읽기로 특히 TV 기전은 그의 놀이터였다. “학부(한양대 영문과) 시절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승부를 서둘던 게 습관이 됐다”는 설명. 하지만 빠르기만 한 건 아니다. 서봉수가 “가볍게 내려앉아 급소를 조여온다”며 ‘나비류’란 별명을 선사했을 만큼 그의 착점은 예리했다.
“3000년 넘는 바둑 역사에 작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지난 23년에 보람을 느낍니다. 퇴직 후에도 밀렸던 논문 정리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대회 출전도 늘리고 싶은데, AI(인공지능) 등장 후 정석이 몽땅 바뀌어서 쫓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