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잊고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12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해라.”
학교 폭력 피해를 고백하는 이른바 ‘폭투(폭력+미투)’가 배구를 중심으로 한국 스포츠계에 번지고 있다. 지난해 7월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이 지도자들의 폭행 실태를 고발했다면, 이번엔 선·후배나 동료 간 괴롭힘을 증언하는 것이 차이다. 피해자들이 10여 년 전 일들을 꺼내 들어도 가해자들은 시차 없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철없던 10대 시절의 일”이라고 변명해도 소용없는 시대다.
◇”쌍둥이, 10년 전 그 짓을 기억하느냐”
배구 선수 이재영-이다영(25·흥국생명) 쌍둥이 자매의 폭투는 지난 10일 새벽 불거졌다. 자매와 같은 학교(전주 근영중) 배구부였다고 밝힌 피해자 A씨는 “10년 전 일이라 잊으려 했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 같다”며 21개 사항에 걸친 피해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했다. 상습 폭행이나 욕설 외에도 칼로 협박하거나 금전을 상습적으로 갈취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쌍둥이 자매가 폭로 글이 올라온 지 16시간 지나 “철없었던 지난날 저질렀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상처를 줬다”며 머리 숙였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자매의 배구계 퇴출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고 구단엔 징계 요구가 빗발쳤다.
흥국생명이 심신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징계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번엔 다른 피해자 B씨가 13일 추가 피해 사실을 폭로했고, 14일엔 학부모 C씨가 “중학교 시절 쌍둥이가 어머니(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 세터 김경희씨) 지시 아래 둘이서만 하는 배구를 했고, 또래 선수들은 운동도 못 하고 괴롭힘만 당했다”고 증언을 보탰다. 결국 15일 대한배구협회는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국가대표 자격을 무기한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흥국생명도 무기한 출전 정지를 결정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16일 비상대책회의를 연다.
폭투 불똥은 남자 프로배구로 튀었다. OK금융그룹의 공격수 송명근(28)과 심경섭(30)이 중·고교 시절 저지른 폭행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재조명됐다. 두 선수는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올 시즌 잔여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
14일엔 한 네티즌이 “중학교 시절 머리를 박고 ‘가나다라’를 외우게 하거나 바가지에 눈물·콧물·침이나 오줌을 싸서라도 채우게 강요한 사람이 있었다”면서 “그의 모습을 TV로 보는 게 괴롭다”고 인터넷에 썼다. 수도권 연고 현역 여자 프로 배구 선수 D가 가해자로 거론된다.
◇피해 학생들 “합숙소가 폭력 온상”
전문가들은 “당분간 피해 신고가 잇따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 엘리트 체육계에 폭력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구문(舊聞)이다. 하지만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서 피해자들의 대응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윤현 용인대 유도학과 교수는 “가해자가 스포츠 스타가 돼 언론 주목을 받으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심해진다”며 “예전과는 달리 요즘엔 SNS에 한 줄만 적어도 일파만파 퍼진다. 최근 가해자들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종목에서도 피해자들이 비슷한 사례를 폭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합숙 생활이 선수 간 폭력의 온상이라는 비판도 있다. 지도자도 모르게 때릴 수 있고, 빨래·청소 등 허드렛일을 강요하면서 폭력이 대물림된다는 지적이다. 이재영-이다영 자매도 합숙소 안에서 가해가 빈발했다. 남자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 E씨는 “송림고교 배구부 시절 3학년 선배 F가 노래 부르라는 강요에 1학년인 내가 응하지 않자 F는 2학년 선배(송명근)를 팼고, 그(송명근)는 내 고환이 터지도록 폭행해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12월 발표한 ‘학생선수 인권침해 실태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학생 21.5%, 고등학생 23.7%가 신체 폭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합숙 경험이 있으면 폭력 피해자가 10%p가량 늘었다. 피해자들의 증언 중에는 “선배들이 스트레스를 숙소에서 후배 패는 것으로 푼다” “기량이 압도적인 ‘에이스’가 괴롭히면 감독조차 개입 못 한다” 는 내용도 있었다.
정지규 경일대 스포츠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를 통해 학교 폭력은 시효 없는 중범죄임을 각인시켜 사회 전반의 인식 및 시스템 개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