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챔피언이 마지막 점프를 준비합니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8일 베이징 서우강 빅에어 경기장. 중국 프리스타일스키 간판 에일린 구(19)가 슬로프 끝에 서자 장내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금이냐, 은이냐, 동이냐!” 그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구가 슬로프를 활강하기 시작했다. 점프대에서 날아오른 구는 공중에서 4바퀴 반을 회전하고 착지에 성공했다. 관중석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맙소사!” 구는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환희에 차 소리를 질렀다. 전광판에 뜬 점수는 94.5점. 금메달을 확신한 중국 관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국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구의 활약으로 결국 이번 올림픽에 신설된 빅에어 첫 금메달은 개최국인 중국에 돌아갔다. 경기 직후 구는 “오늘 시도한 1620도 회전은 연습 때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기술”이라며 “올림픽 무대에서 내 도전 정신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해 어머니의 반대에도 밀어붙였다”고 밝혔다.
에일린 구는 올림픽 개막 전부터 실력뿐 아니라 독특한 이력으로 주목받았다. 구는 1990년대 미국에 이민 간 중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그의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 부촌에서 구를 홀로 키웠다. 그의 미국인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구는 2019년부터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차세대 미국 스키 스타로 주목받았다. 미국 대표로 나간 두 차례의 슬로프스타일 월드컵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다. 하지만 지난 2019년 돌연 중국 대표팀으로 옮겼다. 중국 대표로는 하프파이프, 빅에어, 슬로프스타일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13번의 월드컵에서 10개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중 7개가 금빛이었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 에일린 구 대신 ‘구아이링(Ailling Gu· 谷爱凌)’이라는 중국 이름을 달고 중국 대표로 참가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미국이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인권 탄압을 문제 삼으며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는 등 양국 갈등이 깊어지면서 미 언론이 그의 중국행을 다시 조명했다. “미국의 ‘국민 여동생(darling)’이 될 수도 있었던 에일린 구가 중국을 택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는 헤드라인이 쏟아졌다. 그의 국적을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는다. 구는 중국 대표팀으로 옮기면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냐는 질문에 한 번도 뚜렷이 답한 적이 없다. 중국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날 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도 국적 관련 질문만 수차례 나왔지만 구는 “나는 미국에 있을 때는 미국인이고, 중국에 있을 때는 중국인”이라고만 했다.
이 때문에 이날 그의 금메달 소식에 양국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중국 언론은 “구아이링이 역사를 새로 썼다”고 했다. 매년 여름방학이면 어머니와 함께 중국을 찾아 방학을 보냈다는 일화와 함께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나타를 보며 자란 하이뎬(베이징 시내의 구) 키즈”라고 한 발언이 다시 주목받았다. 나타는 중국 관영 CCTV에서 2003년부터 방영한 인기 만화 영화다.
미국은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젠 후닥 전 X게임 금메달리스트는 “에일린 구가 지금 위치에 오른 건 미국에서 선수로 훈련했기 때문”이라며 “그가 중국을 대표해 올림픽에서 뛰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딴 메달이 미국 것이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구는 운동뿐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외모까지 준수한 ‘엄친딸’이다. 지난 2020년 미국판 수능인 SAT에서 만점(1600점)에 가까운 1580점을 얻어 스탠퍼드대에 합격한 수재다. 루이비통, 구찌 등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았고, 보그와 엘르 등 유명 패션 잡지 표지를 장식한 패션모델이기도 하다. 구는 이제 주 종목인 슬로프스타일(14일)과 하프파이프(18일·이상 결승 기준)에서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