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프로 기사라도 걷는 길은 조금씩 다르다. 신진서 같은 승부사, 목진석으로 대표되는 지도자, 송태곤류의 해설자 등 다양한 세부(細部) 직업군이 존재한다. 최근 일시 귀국한 안영길(42) 6단은 대표적 해외 보급 기사로 분류된다.
그의 ‘일터’는 호주다. 대양주 전체에서 유일한 프로 기사이다 보니 바둑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이 안영길 없이는 안 돌아갈 정도다. 2009년 이후 공식 직함은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한국기원 객원 기사로도 활동했던 중국 출신 고 우쑹성(吳淞笙) 9단에게서 물려받았다.
“대표팀이라고 해도 우리 식의 체계적 훈련이나 경쟁은 없어요. 한번 모이려면 무조건 비행기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땅이 넓다 보니. 그래도 국제대회가 가까워지면 지도 대국을 신청하는 등 의욕들이 대단해요. 최고수는 타이젬 8단 정도인데 제게 정선으로 둡니다.”
대표팀 관리와 함께 호주 바둑 전반에 걸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영주권을 받았다. 호주 정부가 바둑을 직업으로 인정하고 영주권을 부여한 첫 케이스로 기록됐다.
“호주 바둑 인구는 총 2만명 선으로 추산되지만 클럽에 나올 정도의 골수 팬은 200명쯤 됩니다.” 동호인들의 자원봉사 형식으로 운영하는 호주바둑협회는 1970년대 창설 이후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호주 바둑계 터줏대감이던 고 한상대 교수에 이어 현재 회장도 한국인(신명길)이 맡고 있죠.”
안영길은 전도 유망한 기대주였다. 1997년 17세 입단 직후 1패 뒤 18연승을 질주하자 모든 사람이 그의 성공을 확신했다. 희생자 18명 중엔 서봉수 등 거목도 많았다. 그의 활약은 제8회 신예 10걸전(2004년) 결승에 오를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휴가 나와 둔 결승전서 그는 네 살 아래 박정상에게 완패했고, 그때부터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안영길의 기사 전적표는 2008년 7월 28일 13회 삼성화재배 예선 박정환전 패배 이후 14년째 멈춰 서 있다. “제대 후 성적이 떨어지면서 실망이 컸어요. 1인자가 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안영길은 그때부터 영어 공부, 유럽 답사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쳐 호주에 짐을 풀었다. 과감한 ‘항로(航路) 변경’이었다.
2010년부터는 한국기원에서 매년 바둑 세계화 작업 지원금도 받았다. 바둑 세계화 작업에 함께 매진하는 윤영선(독일), 이강욱(베트남), 이용찬(태국), 김윤영(캐나다) 등 동료 프로 기사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낸다. “우리끼리 온라인 교류전도 많이 하지만 정식 대회는 치팅(cheating·부정행위) 우려로 못 열고 있어요.”
안영길이 배출한 호주인 ‘제자’는 줄잡아 200여 명. 언젠가 그들 중에서 아시아 강호들과 대등하게 맞설 기사를 키워내는 게 안 6단의 꿈이다. “현재 시드니대학 바둑 클럽 회장을 맡고 있는 중국계 여학생이 초등학생 때부터 제가 가르친 제자예요. 그들이 성장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승부 최일선서 물러난 은퇴 기사는 대부분 호선(互先) 대국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토로하곤 한다. 안영길은 어떨까. “짜릿한 맞바둑이 그리울 때면 온라인 고수들과 몇 판 두면서 달래지요. 하지만 승부를 떠나 보급으로 전환한 결정이야말로 제겐 신의 한 수였어요. 지금 생활이 너무도 만족스럽습니다.”
2013년 잠시 귀국했을 때 소개받아 결혼한 아내, 만 세 살 된 딸과 시드니에서 함께 산다. 안 6단(보급 단위로는 8단)은 오는 18일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