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카타르 월드컵은 5대륙이 모두 16강 진출팀을 배출한 사상 최초의 대회다. 유럽 8팀, 남미 2팀 외에도 북중미 1팀(미국), 아프리카 2팀(모로코, 세네갈)이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2022년 12월1일 스페인전에서 승리,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일본팀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놀라운 것은 ‘축구의 변방’ 아시아의 약진이다. 한국, 일본, 지리적으로는 오세아니아지만 아시아 축구연맹 소속인 호주 등 무려 3팀이 16강 고지에 올랐다. 아쉽게 탈락했지만, 16강전에서 일본이 크로아티아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격전 끝에 패하고, 한국은 FIFA 랭킹 1위 브라질과 수비 위주가 아닌 정면 대결을 펼치다 1대4로 패했다. 한일 모두 기다렸을 꿈의 대진표, 한국 대 일본의 월드컵 준준결승은 성사되지 않았다.

꿈의 대결은 다음 기회로 미뤄졌지만, 다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과 일본은 누가 더 강한가. 딱 잘라 말씀드릴 수 있다. 일본이다. 월드컵 직전 발표 FIFA 랭킹은 일본이 24위, 한국이 28위다.

다른 지표도 있다. 일본은 2회 연속 16강에 진출했다. 아시아 팀으로서는 최초의 업적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조 2위로 16강에 진출, 벨기에와의 맞대결에서 분루(憤淚)를 삼켰다. 47분, 52분 강력한 중거리슛 두 방으로 2대0으로 앞서가다 90+4분에 통한의 역전골을 허용하며 2대3으로 무너진 것이다.

세계 축구계는 일본의 실력을 월드컵 16강 안정권, 한국의 실력을 16강 도전 가능권이라 평가한다.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본의 전력(戰力) 안정성이 우리보다 위라는 뜻이다. 역대 한일전 전적은 한국이 42승 23무 16패로 압도적 우위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경기력이 역전된 것이다. 무엇이 일본 축구를 탈아시아급 강팀으로 만들었는가.

이 저변에 2005년 일본축구협회(JFA)가 발표한 ‘일본의 길(Japan’s Way)’ 프로젝트가 있다. 2050년까지 축구 관련 인구를 1000만 명까지 늘리고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풀뿌리부터 대표팀까지를 망라한 비전 제시다.

대표팀, 유소년, 지도자, 축구 저변 확대가 ‘일본의 길’의 4대 기둥이다.

글로벌 통계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JFA에 등록된 선수는 82만 명을 상회한다. 우리는 9만 명 남짓이다. 82만 명은 우리 기준으로 따지자면 프로축구 선수와 진지한 생활체육인을 망라한 숫자다. ‘축구의 인기와 축구선수 숫자가 그 나라 축구 수준을 결정한다’는 믿음으로, 축구를 향한 모든 종류의 열정을 협회로 수렴(收斂)하도록 애쓰는 것이다.

◇‘유럽 수준의 지도자 양성’ 추진

계획만 세운다고 일이 성사되지는 않는 법. 일본 축구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력했는가. 1993년 J리그가 출범할 당시 나온 문서가 ‘100년 구상’이다. 100년 안에 일본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겠다는 장대(壯大)한 청사진이다. 일본은 ‘100년 구상’ 계획을 지금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다. 100년 구상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최근 5~6년 사이의 구체적인 움직임만을 분석해보자.

2016년 일본프로축구 J리그 이사진은 일본 선수의 경기력 정체(停滯)의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결론은 “일본의 코칭 프로그램은 세계적 기준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특히 유소년 프로그램이 그렇다”였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일본은 유럽 전역을 돌며 각지의 유소년 아카데미를 연구했다. 일본의 선택은 런던을 본거지로 하는 구단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 발달 조건에 맞춰 섬세하게 기술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는 콘셉트가 일본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본 축구계는 웨스트햄 유소년 아카데미의 총괄 책임자 테리 웨스틀리를 전임 고문으로, 운영 책임자 애덤 레이메스는 전략 기획 이사로 초빙했다. 그러고 전권(全權)을 주고 미래를 맡겼다. 핵심은 유럽 수준의 ‘지도자 양성’이었다. 유럽에서 통할 수 있는 선수들을 길러낼 능력을 갖춘 일본 지도자를 양산(量産)하자는 목표였다. 여기에 독일 시스템의 장점을 접목해 일본만의 노하우를 쌓았다. 우수한 지도자가 늘어나면 양질의 선수들이 대량으로 배출되는 길이 열린다. 그 노력의 결실이 이번 월드컵이다.

2022년 12월 2일 이른 아침 도쿄 시부야에서는 수많은 팬들이 스페인과 맞붙은 일본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사진=AP·뉴시스

◇日,’자기 축구’를 하면서도 성적 내

독일과 스페인을 격침(擊沈)한 일본의 4골이 모두 이 프로그램을 거쳐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의 발끝에서 나왔다. 코스타리카에 패한 후 많은 이가 일본의 스페인전 패배와 예선 탈락을 점쳤지만, 선수들은 달랐다. 유럽 강호들과의 맞대결이 “자신 있다”고 했다. 일본의 핵심 미나미노 다쿠미(AS 모나코)는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과의 대결을 두려워하는 선수는 (대표팀에) 한 명도 없다.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유럽의 소속팀에서 평소에 하던 것처럼 뛸 것”이라고 했다. 결과도 보여줬다.

일본의 성취가 놀라운 것은 웅크리는 축구가 아니라 자기 축구를 하면서도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현대 축구의 키워드는 압박, 빌드업, 전환이다. 모든 선수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골키퍼부터 이어지는 패스 길을 차단하는 압박, 볼의 소유권을 유지하며 정확한 패스를 통해 상대의 압박을 뚫고 공격 루트를 개척하는 빌드업, 상대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해 발생한 반대편의 넓은 공간을 활용, 빠르게 침투하며 찬스를 만드는 전환. 이러한 요소를 완비하지 않고는 세계 수준에서의 경쟁이 불가능하다. “일본에는 전 포지션에 세계적 기량과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있다”는 건 세계 축구계의 공통된 평가다.

◇피라미드 시스템

일본 축구계의 또 다른 힘은 피라미드 시스템이다. 모든 선수가 전업(專業) 선수인 프로축구 리그는 3부까지 58팀(한국은 2부까지 25팀). 세미 프로 지역 리그까지 합치면 9부리그까지 조직을 마쳤다.

박공원 대한축구협회 이사는 “JFA와 J리그는 국가대표-풀뿌리-프로축구의 선순환(善循環) 삼각 구조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JFA가 풀뿌리 수준에서 저변을 넓히고 기술적, 체력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모은다면 J리그는 선수들을 최대한 유럽으로 보내려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선수가 나오면 협회가 소속 구단에 보상금을 주고 유럽 진출을 돕는다는 것이다. 구단도 ‘일본 축구의 발전’이라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를 수락한다고 한다.

유럽 진출 선수가 80명을 넘다 보니 JFA는 아예 유럽 한복판에 일본 대표팀을 위한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파주 NFC와 흡사한 시설을 독일 뒤셀도르프에 마련한 것이다. 일본축구협회는 이곳을 거점으로 언어, 문화적 적응 등 일본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축구를 산업으로 인식

일본 축구의 발전이 ‘자본의 힘’ 덕분에 가능했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은 축구를 산업으로 인식한다. 축구를 통해 수익을 내고, 수익을 토대로 더 우수한 선수들을 길러 유럽에 수출한다. 구단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흑자 달성’이다.

J리그가 처음부터 번성했던 것은 아니다. 1992년 창설, 1993년 첫 시즌 개막 후 몇 년 동안은 흥행 성적이 좋았다. ‘1990년대 일본의 3대 히트 상품 가운데 하나’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관중이 급감하고 리그의 열기가 식었다. 너도나도 ‘우승’만을 목표로 과잉 투자를 자행한 대가였다.

파산 위험에 몰린 구단이 속출하자 구단과 선수가 힘을 합쳐 특단의 대책을 내놨다. 1990년대 말 선수들이 자진해서 연봉을 절반으로 삭감한 자구(自求) 노력이다. 구단 임직원들도 연봉 삭감에 동참했다. 이때가 J리그 산업화의 분기점(分岐點)이다. 대기업 지원을 등에 업고 성적을 내는 일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밀착형 영업을 통해 자생력(自生力)을 길렀다. 자체적으로 이익을 내 외부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익을 내는 산업’이 되니 참가 팀 수가 늘어났다. 부동(不動)의 일본 최고 스포츠는 프로야구다. 야구가 도쿄와 오사카, 요코하마, 고베 등 대도시를 연고지로 하기에, 일본프로축구는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삼는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그렇게 만들어간 ‘우리 도시, 우리 팀’이라는 팬덤은 일본 축구의 자부심 가운데 하나다.

연봉 삭감으로부터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의 성적표를 살펴보자. 2007년 당시, 1부리그 18개 팀과 2부리그 15개 팀 중 흑자 구단이 26팀, 적자를 낸 팀은 7개 구단(FC도쿄, 요코하마FC, 니가타, 빗셀 고베, 미토, 도쿠시마, 사간도스)이다. 최고 인기 팀인 우라와 레즈는 무려 79억6400만 엔(당시 환율 기준 약 1120억원)의 영업 이익을 냈다. 당해 대한축구협회의 1년 수입을 능가한 엄청난 액수다.

◇한국도 ‘자기 축구’ 했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도 자기 축구를 했다. 수비 위주의 수세적 역습 축구가 아니라, 빌드업을 통해 착실하게 찬스를 만드는 적극적 공세적 축구를 했다. FIFA 통계에 잡히는 점유율, 유효슛, 공격 진영에서의 플레이 시간 등 모든 지표가 ‘한국 축구의 적극성’을 웅변한다. 벤투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는 월드컵을 결산하는 12월 10일 자 칼럼에서 “일본이 이번 월드컵에서 빌드업과 압박, 전환 세 가지를 다 보여줬다면, 벤투가 이끌었던 한국은 이제 빌드업 하나를 마스터한 것이 두 나라의 간격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고 썼다. 기사 중에는 “한국 축구가 아등바등해서 16강에 가는 기적이 아니라 일본이나 다른 나라처럼 좋은 모습을 꾸준히 월드컵에서 보여주려면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황인범 선수의 귀국 진전 발언도 실려 있다.

진단(診斷)이 정확해야 올바른 처방(處方)이 나오는 법이다. 진실을 외면하면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불평불만과 하소연은 경기력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축구는 지금 한국 축구보다 확실하게 몇 걸음을 앞서 나가고 있다.

※ 더 자세한 기사는 월간조선 1월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