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까지 ‘모래판의 황태자’로 불리며 국내 씨름판을 호령했던 이태현(47·용인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은 요즘 모래판을 바라보는 게 즐겁다. 한때 국민 스포츠로 큰 인기를 누렸던 씨름은 긴 침체기를 보내다 최근 팬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다시 마주하고 있다. 무엇보다 젊어진 팬들, 특히 여성 팬이 많아진 게 눈길을 끈다. 이태현은 “얼마 전만 해도 만나면 ‘씨름 힘들지?’라던 분들이 요즘엔 “씨름 잘 봤다’라고 하신다”며 입꼬리에 걸쳐진 미소를 걷어내지 못한다.

◇씨름이 세계 호령하는 그날까지

이태현은 2011년 모래판에서 내려온 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모교인 용인대에서 후배들 양성에 힘쓰고 있는 게 본직이지만, 그의 명함엔 그 외에도 대한씨름협회 이사·용인대 씨름부 감독·TV 해설위원·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진흥원 이사장이란 직함이 새겨져 있다. 그는 “몸이 바빠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면서도 “그만큼 씨름 쪽에서 할 일이 많아졌다는 얘기 아닌가”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21일 충북 증평군 증평종합스포츠센터에서 천하장사 이태현 씨름진흥원 이사장이 본지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이태현이 이사장을 맡은 씨름진흥원은 씨름의 원형 보존 및 전승, 그리고 세계화 사업을 추진하는 곳이다. 씨름은 2018년 11월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시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이태현은 “인류무형유산으로 결정되는 순간 몸에 닭살이 돋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이제 막 세계화의 첫걸음을 뗐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씨름이 세계적으로 인지도 높은 스포츠로 자리 잡으려면 먼저 국내 인기가 탄탄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넷의 발달, 익스트림 스포츠 인기 급상승 등 스포츠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씨름은 아직도 ‘우리 민속 씨름 보러 오세요’란 말만 되풀이해요.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그래서 어쩌라고?’소리만 듣고 외면당하는 거죠. 5~10년 후 성인이 될 젊은 층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줘야 합니다.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어요.”

한때 외면받던 씨름은 남자 선수들을 소재로 한 한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이 뒤늦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문을 타면서 다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9년 100회 전국체전 때 젊은 여성들이 모래판에 찾아와 사진을 찍기에 선수들 여자 친구인 줄 알았는데 다 팬들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씨름인조차 그 프로그램이 그렇게 반향이 클 줄 몰랐거든요. 그때 느꼈어요. 그냥 경기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와닿을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4월 21일 충북 증평군 증평종합스포츠센터에서 천하장사 이태현 씨름진흥원 이사장이 여자 출전 선수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 신현종 기자

이태현은 다른 선후배들과 함께 ‘씨름 신상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태권도처럼 씨름의 각 기술 동작을 응용한 품새를 개발해 씨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팬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경기 방식을 개선하는 방법 등이 논의 과제다.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씨름 방송 프로그램도 추진 중이다.

“옛날 조상들의 씨름이 어땠는지도 샅샅이 살펴보고 있어요. 답이 나올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씨름도 ‘한류’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먼저 세계화에 성공한 태권도와 합동 마케팅을 펼치면 시너지가 더 크지 않을까요?”

◇”씨름이 내 인생의 희로애락”

이태현은 “씨름하면서 영광도 누렸고, 쇠퇴하고 진짜 망가진 모습도 봤다. 보고 느낀 게 있기에 할 말도 많다”고 했다. 이태현은 모래판에 구름 관중이 몰리던 1980년대 초, 이만기, 이봉걸, 이준희 등 당대를 주름잡던 장사들의 활약상을 보고 샅바를 잡았다. 경북 의성고 3학년 때 7관왕에 오르면서 주목받았고, 고교 졸업 후 1994년 청구건설 팀에 입단해 그해 곧바로 천하장사가 됐다. 당시 최강이던 백승일과 1시간 반 승부 끝에 계체량으로 꽃가마를 탔다. 그는 “다른 경기는 가물가물한데, 그 경기는 당시 겪었던 고통까지 그대로 몸에 남아 있는 것 같다”며 “꽃가마 탔을 때 정말 구름 위에 붕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태현은 통산 497승을 올렸다. 천하장사에 3차례 등극했고, 백두장사에 20번 올랐다. 백두장사 20승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만기·강호동에 이어 인기를 한몸에 받던 1990년대 후반, IMF 사태가 터지면서 씨름판이 무너졌다. 실업팀들이 잇달아 해체됐고, 내부 파벌 싸움까지 극심했다. 이태현은 2006년 모래판에서 내려와 이종격투기에 도전했다.

“씨름 그만두고 일본에 초청받아 프라이드 대회를 보러 갔는데, 국내 씨름판에서 사라져버린 수많은 관중, 화려한 조명, 그리고 매스컴의 뜨거운 관심이 거기 다 있는 거예요. 순간 내가 설 곳은 저기라고 생각했죠.”

도전은 1승 2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끝났다. 힘은 타고났지만, 경험과 싸움 기술이 턱없이 모자랐다. 2006년 데뷔전은 TKO패, 2008년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1라운드 36초 만에 KO패를 당했다. 2007년 K-1히어로즈 대회에서 일본 선수에게 거둔 TKO 승이 유일한 승리였다.

“이종격투기 했던 그때 3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첫 경기 졌을 때는 한 달 동안 대인 기피증에 시달려 집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냈어요. 그때 오토바이를 배웠죠. 헬멧 쓰고 달리면 아무도 못 알아보니까. 표도르에게 훈련받았던 러시아에서는 혼자 생활하는데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 솔직히 자살 충동까지 몇 번 느껴 고층아파트 옥상에도 올라간 적이 있어요. 다운로드받은 한국 드라마를 백번 가까이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죠.”

이태현은 자존심 때문에 몇 차례 재도전하려다 아내 이윤정씨의 간곡한 만류에 결국 꿈을 접고 2009년 1월 모래판에 복귀했다. 2010년 설날장사에 이어 두 차례 백두장사 우승을 추가한 뒤 2011년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지고 이후 학교 강단에 섰다. 이태현은 1999년 용인대를 졸업한 뒤에도 학업을 이어가 2001년 석사, 200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단 은퇴할 때까지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놓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제가 물러난 다음에도 그 길을 이어받을 후배들을 길러내는 것도 제 역할 중 하나입니다. 씨름 발전이라는 게 어느 한 세대에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많은 선배가 없었다면 제가 없었을 것이고, 또 우리가 잘해야 뛰어난 후배들도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태현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몇 년 전만 해도 신체 조건 좋은 초등학생 영입 경쟁에 씨름은 명함도 못 내밀었는데,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부쩍 인지도나 관심이 높아진 걸 느낀다”고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PS

#1. 씨름판을 호령했던 이태현이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대학교 강단에 서게 된 계기는 뭘까.

그는 “어느 날 강의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는데 유도를 하셨던 교수님 뒤에 갑자기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광채가 빛나는 게 보였다. 운동 선수 생활 끝내고 나면 내 미래가 뭘까 고민하던 차에 저 강단이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태현은 아무리 피곤해도 학교는 무조건 가서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이태현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들였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씨름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주말마다 국영수 과외를 했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셨던 부모님이 ‘운동선수라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며 학업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태현은 “중학교 때 어머니에게 문제를 물어봤는데 모르신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이런 것도 모르면서 왜 나를 가르치려 하는거야라고 따졌다”며 “그때부터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셨는지 검정고시, 방송통신대 졸업하시고 지금 갖고 계신 자격증이 40개가 넘는다”고 했다. 학구열에 불타는 어머니는 이태현이 대학, 대학원 공부를 할 때도 밤마다 수업 끝나는 시간까지 학교에서 기다렸다가 이태현을 차로 집까지 데려갔다.

그의 학업을 도운 또 한 명은 ‘절친’ 김태한 박사다. 어렸을 때 같이 씨름을 하다 그만뒀던 김 박사는 학업이 너무 힘들어 중도 포기하려 했던 이태현의 버팀목이 되어줬다. 이태현은 “학사만 마치고 그만두려 했는데 김 박사가 자기 대학원 가니 같이 가자고 했다. 석사할 때 3년 동안 그 친구는 연구실에서만 살았고, 나는 주말마다 한번씩 올라와서 도움을 받았다”며 “어머니와 김 박사 아니었다면 절대로 강단에 서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