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만할게요.” 2007년 종합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어 16년 동안 피땀 흘린 남자. 정찬성(36)은 “챔피언이 되려고 했고 후회 없이 준비했는데, 이기지 못했으니 냉정하게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링을 내려가 아내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낀 후, 팬들 박수와 함성 속에서 퇴장했다.
한국 격투기 전설 정찬성의 주먹이 멈췄다. 정찬성은 27일 싱가포르 인도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홀러웨이 vs 코리안 좀비’ 메인 이벤트 페더급(-66㎏) 경기에서 맥스 홀러웨이(32·미국)에게 3라운드 KO로 패했다. 정찬성은 1라운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펀치를 몇 차례 적중시켰지만 큰 타격을 입히진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정찬성은 밀리기 시작했다. 2라운드 초반 홀러웨이 펀치를 맞고 휘청거린 후 초크(목을 조르는 것)에 걸렸다. 빠져나오긴 했지만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정찬성은 3라운드에 승부를 걸었다. 숨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난타전을 택했다. 정찬성은 펀치를 주고받다가 얼굴을 강하게 맞고 쓰러졌다. ‘코리안 좀비’라는 별명답게 마지막까지 주먹을 내질렀지만 홀러웨이는 이를 피했다. 결국 정찬성은 23초 KO패했다.
사실 경기 전부터 정찬성 승리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홀러웨이 페더급 랭킹은 1위. 정찬성은 8위에 나이도 더 많다. 정찬성은 2020년 이후 딱 세 번 옥타곤에 올라가 1승 2패에 그쳤다. 같은 기간 홀러웨이는 5번 나서 3승을 거뒀다. 스포츠 베팅 업체가 내놓은 승부 배당률에서도 홀러웨이는 -800, 정찬성은 +550이었다. 홀러웨이에게 800원을 걸어야 100원을 딸 수 있고, 정찬성에게 100원을 걸면 550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보면 대등하지 않은 시합일 수 있었지만, 이번 경기는 홀러웨이가 도전장을 내밀며 성사됐다. 그는 “정찬성 경기를 보면서 자랐다. 꼭 싸워보고 싶은 선수다”라고 말하며 제안했다. 두 선수는 그간 맞대결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정찬성도 “언제, 어디서든 좋다. 지금 페더급에서 홀러웨이를 존경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며 응했다.
홀러웨이는 정찬성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나섰다. 그는 하와이 출신. 최근 하와이 산불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홀러웨이는 경기 전 공식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번 경기는 하와이를 위한 싸움. 희생된 분들에게 승리를 바치겠다”고 말했다. 홀러웨이는 총력을 다하고 난 후 정찬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경기 후 정찬성을 직접 부축해 의자에 앉혔고 “정찬성은 전설이고 불가사의한 선수다.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정찬성은 한국 격투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선수다. 2013년 조제 알도(37·브라질)와, 작년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35·호주)와 UFC 페더급 타이틀 매치를 치렀다. 두 번 다 패하긴 했지만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UFC 타이틀전을 경험했다. 정찬성은 김동현(42)도 한 번밖에 서보지 못했던 메인 이벤트 무대에 무려 10번 연속으로 나섰다.
경북 포항 출신인 정찬성은 학창 시절 경기 남양주로 전학 갔다. 내성적인 성격에 체격은 왜소했고, 사투리를 쓰다 보니 놀림도 받았다. 어린 정찬성을 마음 아프게 바라본 이모가 합기도를 권했고, 이를 계기로 격투기 선수의 길을 걸었다. 2006년 경북과학대 이종격투기과에 진학한 정찬성은 이듬해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2007년 판크라스 네오 블러드 라이트급(-70㎏), 2008년 KOREA FC 페더급에서 나란히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고, 2011년 혜성처럼 UFC에 입성했다. 그해 UFC 140에서 마크 호미닉(41·캐나다)을 상대로 7초 만에 KO승을 거두며 ‘7초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좀비’라는 별명답게, 정찬성은 링 안팎에서 수없이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눈, 코, 어깨, 손목 등 갖은 수술을 받으며 링에 섰다. 2013년 알도와 타이틀전에선 어깨 탈골 부상을 당했는데, 스스로 어깨를 맞추고 경기에 나서는 투지를 보였다. 2020년엔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증상에 눈 수술을 받기도 했다. 정찬성 은퇴가 누적된 건강 악화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그는 “아픈 곳이 너무 많다. 은퇴를 고민하는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날도 “내 머리 상태로 더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했다.
정찬성이 갖은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날 경기 전 “솔직히 말해 모든 한국 선수가 나를 따라와야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기면 후배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다. 그는 “지금 상태에서 더 바라는 건 욕심 같아 멈추려고 한다. 더 이상 평가받고 비교당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같아 홀가분하고 후련하면서도, 무섭기도 하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밝혔다. “살면서 자신의 한계 끝까지 가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까지 잘 버텨주셔서 감사하다”는 답글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