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장재근(63) 선수촌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마치자 선수촌 경비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촌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선수촌장실이 있는 행정센터 복도에서 만난 직원도 같은 인사를 건넸다. 이날은 2023년 3월 이곳에 부임한 장재근 촌장의 퇴임식이 열린 날. 국가대표지도자협의회가 그를 위해 행사를 만들었다. 공식 임기는 이달 28일까지다.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이 19일 오후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장 촌장은 1982 뉴델리, 1986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200m 2연패를 이룬 육상 스타 출신. 은퇴 이후 1990년대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방송 해설위원, 서울시청 육상 팀 감독 등을 거쳐 2년 전 진천선수촌 수장 역할을 맡았다.

그의 재임 기간 열린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지난해 파리 올림픽, 올해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연달아 좋은 성적을 냈다. 특히 최악 성적을 예상했던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다 타이인 금메달 13개를 수확했다. 장 촌장은 “국제 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 지도자들을 강하게 몰아붙였다”며 “결과를 만들어 내서 뿌듯하면서도, 따라오기 힘들어했던 인원들을 잘 보듬어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퇴임을 앞둔 그는 한국 스포츠가 지금의 호성적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沙上樓閣)” “100층짜리 건물에 공실(空室)만 가득한 꼴”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 체육에는 장기적인 비전과 프로젝트가 없어요. 그때그때 대회를 앞두고 허둥지둥하고 선수들 개인 능력에 의존하죠. 작년 올림픽에서 우리가 뭘 잘했기에 성적이 좋았을까 분석한 백서도 없어요. 진천선수촌도 건물만 웅장하지, 그 안의 훈련 시설은 부족한 게 많아요. 내실을 탄탄히 다져야 진정한 스포츠 강국이 될 수 있어요.”

장 촌장은 스케이트보드와 BMX 사이클 등 미래 유망 종목에 투자를 키우는 한편, 기존 종목에서도 세부적으로 집중 육성할 부문을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배드민턴이나 탁구는 우리가 단식·복식 중 전략 종목을 택해 집중 투자하고, 유도는 우리가 어떤 체급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찾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촌장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어느 종목이 올림픽에서 세 번 연속으로 좋은 성적을 내면 그 종목은 시스템을 갖추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수촌 내 새벽 운동 부활, 자정 이후 인터넷 통제 등 강한 통제책을 썼다. “구시대적이다” “현대적이지 않다” 등 비판도 받았다. 선수들 반발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 촌장은 “여긴 엘리트 중에도 초(超)엘리트가 모인 곳이다. 군대로 따지면 특수부대 요원들”이라며 “여기만의 규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이 19일 오후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처음 왔을 때 기강이 말도 안 되게 해이했어요. 어떤 선수는 밤새 암막 커튼 쳐놓고 컴퓨터 게임 해놓고는 아프다면서 오전 운동 안 나오고 의무실 가서 자요. 누구는 토요일 운동 스케줄이 있는데도 집 가고 싶다면서 금요일에 외박을 나가더라고요. 방에서 인터넷 도박하는 선수들도 있었죠. 그런 걸 가만히 둘 수 있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선수촌에 왜 옵니까. 밖에서 혼자 운동하면 되지. 저는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봤고, 우리나라가 국제 대회 성적 내는 데도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인이 최근 진천선수촌을 찾아 “새벽 운동 자율화를 고려하겠다” “지도자 출퇴근과 선수촌 내 가벼운 음주를 허용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장 촌장은 “새벽 운동은 선수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시스템”이라며 “운동 강도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 아침 일찍부터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지도자들 퇴근하고 없을 때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겠는가. 어차피 외출해서 술 마실 수 있는데 선수촌 내 음주 허용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했다. 장 촌장은 “체육회장은 선수촌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해주되, 그 안의 규율에 대해선 새로 올 선수촌장에게 완전한 자율권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이 19일 오후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장 촌장은 퇴임 이후엔 “두세 달 정도 여행 다니면서 생각 없이 쉴 계획”이라며 “그 이후에 대해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체육계를 떠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60년 넘는 인생 중 진천선수촌에서 보낸 2년이 가장 행복했다”며 “함께했던 선수, 지도자, 직원들이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장재근 촌장님이었으면 해결해주셨을 텐데…’ 하고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