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아시안게임과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사대륙 선수권 대회(이하 사대륙)를 연달아 제패하며 ‘피겨 스타’로 떠오른 김채연(19). 그는 어머니 이정아(54)씨가 직접 만들어준 경기복을 입고 빙판에 선다. 이씨는 딸이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경기복을 직접 만들고 있다. 강습비·대관료·전지훈련비 등 돈이 많이 드는 피겨 종목 특성상 처음엔 비용을 조금이나마 아껴보려고 손을 댔다. 선수용 경기복은 한 벌에 최소 150만원 이상, 많게는 1000만원까지 든다. 매년 쇼트프로그램용, 프리스케이팅용 두 벌을 갖춰야 한다.
경기복이 초라하면 예술성 점수에 영향을 줘 피겨 선수들은 돈을 들여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에게 제작을 맡기기도 한다. 김채연은 ‘엄마표’ 피겨 안무복과 함께 7년을 보냈다. “엄마가 만든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서면 엄마와 함께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씨가 만든 의상은 세계 무대에서도 손색이 없다. 김채연의 올 시즌 쇼트프로그램 경기복은 ISU 피겨스케이팅 베스트 의상상 후보에도 올랐다. 까만색으로 공상과학영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 그가 연기할 때 배경음악은 영화 ‘트론: 새로운 시작’에 삽입된 밴드 다프트펑크 곡들이다.
김채연은 요즘 매일 오전부터 6시간씩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세계선수권 대비 막바지 훈련에 전념하고 있다. 11일 공개 훈련에서 “아시안게임과 사대륙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며 “세계선수권에서 더 자신 있게 경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엄마표’ 의상을 들고 나와 “내가 키(153㎝)가 작아서 엄마가 다리 길어 보이게 만들어주셨다. 엄마가 만든 옷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기쁘다”면서 웃었다. 그는 “엄마가 이제 옷 만드는 걸 힘들어하셔서 언제까지 입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면서 “내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까진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달 25일(현지 시각) 미국 보스턴에서는 세계선수권이 열린다. 아시안게임이나 사대륙 대회와 달리 전 세계 강자들이 총출동한다. 유력한 우승 후보는 대회 4연패에 도전하는 일본 사카모토 가오리(25). 작년에 김채연은 동메달(203.59점)을 땄는데 올해는 더 높은 시상대를 바라본다. 하얼빈 아시안게임에선 김채연이 실수를 연발한 사카모토를 제치고 우승했다.
최근 기세는 좋다. 김채연이 사대륙에서 작성한 개인 최고 기록(222.38점)을 경신한다면 우승도 노려볼 만하다. 작년 대회에서 사카모토가 222.96점으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김채연은 “다른 선수를 신경 쓰기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려 한다”고 말했다.
대표팀 훈련이 끝나면 개인 훈련을 더 한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비타민을 챙겨 먹고, 수면량도 늘렸다고 한다. 그는 “딱히 불편한 곳 없이 몸 상태가 좋다”고 말했다. 하얼빈에서 그랬던 것처럼 즉석 밥, 명이나물 반찬, 짜장 소스 등 숙소에서 간편하면서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갈 계획이라고도 했다.
그는 “세계선수권을 대비해 안무 디테일을 살리려고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아시안게임과 사대륙 경기 영상을 복기한 것을 토대로 특정 동작에서 얼굴 표정을 더 활용하거나, 점프를 뛸 때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당장은 기술 난도를 높일 계획은 없다고 했다. “이번엔 지금까지 했던 기술을 더 완벽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는 건 시즌이 끝나고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선수권은 전초전. 내년 올림픽이 진정한 전장이다. 올 초 수리고를 졸업한 김채연은 올림픽 준비를 위해 대학 입시를 1년 미뤘다. 그는 “후회가 남지 않게 하고 싶었다”며 “오로지 올림픽에 집중하려 한다”고 했다. 가끔 피겨를 같이 하는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중압감을 푼다. “아이돌 얘기를 많이 해요. 걸그룹 에스파 팬인데 꼭 만나보고 싶어요.”
보스턴 세계선수권 대회엔 남자 피겨 간판 차준환(24·고려대)도 출격한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사대륙 은메달을 딴 차준환 역시 세계선수권 메달이 목표다. 그는 “올림픽 국가별 쿼터가 걸린 대회인 만큼 한국 피겨를 위해 최대한 실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차준환은 최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 후보자를 뽑는 선정에서 탈락했다. 그는 “도전 자체가 의미 있었다. 4년 뒤 다시 기회가 오면 잘 준비해서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