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에 새 시대가 열렸다. 2004 아테네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유승민(43) 신임 대한체육회장(42대)은 그 변화를 상징한다. 지난달 28일 공식 취임한 그는 매일 회의와 면담, 출장 등 숨 가쁜 일정을 이어가느라 얼굴이 다소 푸석해진 모습이었다.
-(회장 선거는) 극적인 승리, 이변이었다.
“상당히 타이트(바듯하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체육회 개혁에 대한 바람이 워낙 컸던 것 같다. (체육회장) 선거에 나간다고 했더니 다 말리더라. 이(기흥) 회장을 이길 수 없다, 체육회가 엉망인데 가서 더 힘들어진다, 나이가 너무 어려 무조건 떨어진다, 일단 경험 삼아 2등을 목표로 삼아라... 온통 우려와 만류만 들렸다. 그럼에도 흔들리진 않았다. 한 표 한 표 쌓아나가다 보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결국 통했다.”
-체육회장으로 뭘 먼저 하고 싶나.
“정리해야 할 기존 사업들이 꽤 있다. 체육인을 대상으로 맞춤 교육을 제공하는 장흥 체육인재개발원은 예산 확보가 급선무다. 잘못하면 문을 못 열 수도 있다. 태릉빙상장 철거와 새 빙상장 부지 선정은 일단 좀 더 검토하고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와 마찰을 빚느라 떨어진 내부 직원들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다.”
-학교 체육에서 ‘최저 학력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고교 선수들 중 성공하는 건 5% 정도다. 그렇다고 나머지를 다 사회 부적응자나 실패자라고 여기는 풍토가 문제다. 선수들도 나중에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 체조 선수 출신 회계사나 축구 선수 출신 의사가 나온다. 그런데 학교에서 운동할 때는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일괄적으로 수업(일수) 기준을 정해 놓고 안 맞추면 학교를 못 다니게 하는 것 자체가 횡포다. 학기 중엔 학생 선수들은 정규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대회를 여름방학에 많이 몰아서 하는데 땡볕 아래 경기를 하는 건 되레 인권침해에 가깝다. 학생 선수들은 7~8시간 교실에 앉아 꼬박 수업을 받고 난 뒤 연습하는데 몸이 굳은 상태라 본격 연습을 하려면 해가 진다. 결국 저녁에 1~2시간이 연습 전부인데 그러다 보니 운동부도 과외를 받는다. 이제 이런 부조리한 제도를 개선할 때가 됐다.”
-두 아들도 축구 선수라고.
“그렇다. 운동 선수 학부모로서 현장을 더 가까이서 본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최저 학력제 폐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큰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운동보다 공부를 더 시킨다. 둘째는 축구에 더 재능이 있다. 아이들마다 재능이 다 다른데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와 운동 중 어디에 비중을 둘 지 부모와 학생이 정해야 하는데, 외부에서 강제하는 게 문제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교육부와 풀어야 한다. 우리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줘야 한다. 전국 운동 선수와 학부모, 지도자 약 30만명 상대로 설문조사를 할 수 있다. 90% 이상 최저 학력제 반대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 데이터를 가지고 정부와 국회를 찾아가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 엘리트 체육도 위기라는 지적이 있다.
“전문 체육이 정말 위기다. 생활 체육은 종목이 다양해지고 인구가 늘고 있다. 전문 체육은 반대다. 내 선수 시절과 비교해 탁구 엘리트 선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전문 체육이 살아나려면 스타가 나와야 한다. 김연아가 있어서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계속 나오고, 목동에 피겨 대회 열리면 관중석이 가득 찬다. 스타가 나오려면 결국 학교 운동부에 최저 학력제 같은 규제를 없애야 한다. 신유빈이 고등학교 안 갔다고 비난하는 사람 있나? 학생 선수들 대회 나가려고 하면 학교 출석 일수를 적어내라고 하더라. 시험 성적 떨어져서 대회를 못나가기도 한다. 못 해먹겠다고 그만두려는 선수, 학부모가 한둘이 아니다.”
-선수도 문제지만 일반 학생들 체력 저하도 심각하다.
“운동의 긍정적인 효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적어도 중학생 때까지 방과 후 하루에 한 시간씩 스포츠를 의무적으로 하도록 제도화하면 9년 동안 세 종목 정도는 특기를 가질 수 있다. 자기 소질을 발견하고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려는 아이들도 많이 나올 수 있고 아이가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 부모들도 자연스레 따라간다. 체육 저변과 산업 연관 효과가 늘 것이다.”
-‘K스포츠’ 활성화 공약이 눈에 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 스포츠 콘텐츠를 K팝이나 K드라마처럼 한류의 한 분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보고자 한다. 손흥민과 같은 수퍼스타도 좋지만, 양궁이나 탁구, 배드민턴 등 종목별로 해외 팬들이 많은 선수들의 가치를 좀 더 부각시키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파리 올림픽 당시 코리아하우스에서 한복 패션쇼를 열었듯 다양한 협업을 통해 코리아란 브랜드를 다방면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선수촌 새벽 운동을 자율화하겠다고.
“나는 새벽 운동을 좋아한다. 20년간 해왔다. 하지만 종목마다, 선수마다 운동 여건이 다르다. 모두 똑같이 새벽 운동을 하기보단 종목별로 자율성을 줘야 효과가 더 크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내야 하는 역도 선수들은 (새벽) 러닝을 하면 근육이 풀어진다. 새벽에 주로 산책을 한다. 탁구는 기술을 단련하는 야간 운동에 집중한다. 훈련할 때는 ‘사점(死點)’을 넘나들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구체적 훈련 방법은 알아서 짤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선수촌 내 음주 허용이 논란이 됐다.
“오해가 있다. 선수들은 당연히 막는다. 다만 지도자들까지 다 금지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나가서 술 먹고 들어오는 것보단 그 시간에 선수들을 더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지 않나. 무조건 막는다고 다 될 일이 아니다. 물론 선수촌장과 지도자들이 협의해 결정하는 게 좋다.”
-첫 여성 사무총장을 임명하면서 여성 등용을 강조했다.
“2013년엔 IOC 위원 중 여성 비율이 20%였는데 이제는 47%까지 올라왔다. 파리 올림픽에선 남녀 출전 선수 숫자가 같았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능력 있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동안 너무 남성 위주였다. 체육회 안에 능력 있는 여성 인사들이 많다.”
-이기흥 회장 시절에 만든 스위스 로잔 연락 사무소는 유지하나.
“로잔 연락 사무소는 올 7월까지 예산이 편성돼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할 상황은 아니다. 전북도가 올림픽 유치 후보로 선정됐으니 로잔 사무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