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 오비!” 바야흐로 ‘오비(오베치킨)의 시대가 열렸다.
‘슬랩슛의 달인’이자 ‘러시안 특급’ ‘러시안 헐크’로 불리는 오비(오베치킨·39·워싱턴 캐피털스)는 7일(한국시각)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의 UBS 아레나에서 열린 2024-2025시즌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뉴욕 아일랜더스와 원정 경기에서 2피리어드 종료 12분34초를 남기고 파워플레이에서 슬랩슛(엄밀하게 말하면 논스톱 슛이 아닌 일단 정지였지만)을 터뜨렸다.
이는 오비의 NHL 통산 895번째 골로 ‘아이스하키 전설’로 통하는 웨인 그레츠키가 보유한 NHL 통산 최다 득점(894골) 기록을 깨뜨린 순간이었다. 오비는 기록 달성 순간, 장갑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감격의 골 세리머니를 작열했다. 또 경기장의 워싱턴 동료 선수들은 물론 상대 선수들과도 기쁨을 함께했고, 벤치에 있는 코치진과도 감격을 나눴다.
이날 오비의 경기 출전 수는 그레츠키의 통산 경기 수(1487경기)와 같았다. 마침 그레츠키도 현장에서 이 순간을 지켜봤다.
경기장에는 ‘알렉산드르 오베치킨-895’가 새겨진 카펫이 깔렸다. 오비는 “정말 미친 것 같다. 통산 득점 1위가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까지 몇 주 정도 걸릴 것 같다”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자랑스럽다는 것이다”고 했다.
워낙 가정적인 그는 기록 달성에 도움이 된 가족과 팀 동료, 코칭스태프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오비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이다”며 “아내와 아들 그리고 러시아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애초 NHL 측은 오비의 NHL 정규리그 역대 통산 최다 골 기록 달성 가능일을 4월 12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보다 빨리 기록 달성을 할 정도로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
오비는 알렉산드로 오베치킨의 별명이다. 러시아 출신 선수들 이름은 좀처럼 팬들이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렵다. 특히 영어권에서 슬라브어인 러시아어를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선수들이 이름이 길어 풀네임 대신 애칭이나 약칭으로 부른다. 보통 이름 알렉산드르를 줄여 ‘사샤’라고 하지만 성인 오베치킨으로 워낙 알려져 이를 줄인 ‘오비’로 부른다. 러시아나 미국에서도 통용되는 그의 일관된 별명이자 애칭이다.
이날 대기록을 달성한 오비는 2004년 NHL 드래프트 1순위로 워싱턴에 입단했다. 숱한 유혹에도 20년 동안 워싱턴 소속으로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오비는 워싱턴 입단 전 러시아에서도 오직 디나모 소속으로 활약했을 정도로 한 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NHL 진출 첫 시즌 칼더 트로피(신인상)를 시작으로, 로켓 리처드 트로피(득점왕)를 9번 받았고, 하트 트로피(MVP)도 3번 수상했다. 2018년 워싱턴의 첫 우승을 이끌며 콘 스미스 트로피(플레이오프 MVP)와 더불어 우승컵 스탠리컵을 들어 올린 순간은 팀내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파워플레이(상대 페널티로 인한 수적 우세) 상황에서 날리는 슬랩슛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파워플레이하에서 그가 휘두르는 스틱웍(슬랩슛)을 가로막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슬랩슛의 달인’이었다. 아이스하키에서 원타이머 슬랩슛(One-Timer·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배트로 공을 치듯 그대로 슈팅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가장 위협적인 공격 수단으로 꼽힌다.
오비가 두께 2.54cm, 폭 7.62 cm의 압축고무인 퍽(Puck)을 체중까지 실어 때리면 총알 못지않은 위력을 보였다고 선수들은 말한다. 그만큼 그의 슬랩슛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스하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슬랩슛을 날렸던 선수로는 1980년 현역에서 은퇴한 NHL의 전설 바비 헐이 꼽히는 데 그가 날린 슬랩슛은 무려 시속 118마일(약 190km)이 넘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고 알려졌다. 오비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오비는 이날 그레츠키의 최대 득점 기록을 넘어선 것을 비롯 파워플레이 325골, 연장 27골, 결승골 136골 역시 NHL 기록이다.
오비는 축구에서 ‘손흥민 존(페널티아크 근처)’처럼 골대 앞 페이스오프 마크 탑서클 근처에서 슬랩슛을 많이 하는데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이를 ‘오비 존’으로 부른다.
서광석 광운중 감독은 “오비의 슬랩슛은 막을 자가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다. 그냥 최고다. 정말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깨기 어려울 것이다. 나이도 있는데 성실하고 타의 모범인데다 그 정도로 실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선수들의 교과서로 불릴만하다”고 했다.
오비는 기록 달성을 앞두고 위기가 있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며 러시아 선수들이 전쟁 지지나 푸틴 지지를 하면 국제스포츠계에서 절연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하키광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절친 관계였던 그는 초반 ‘푸틴과의 절연 선언을 하라’는 압력을 받으면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 활동을 중단하는 등 정치 관련 질문에 “노 코멘트”로 일관하며 오직 하키에만 열정을 쏟았다.
또 오비는 지난해 11월 19일 유타 하키클럽과의 NHL 정규시즌 경기(6대2 승)에서 3피리어드 중반 유타 포워드 잭 맥베인과 충돌하며 왼쪽 비골(무릎 아래 마디의 바깥쪽 뼈)이 골절되는 중상을 당하며 최대 위기를 맞았지만, 4주 이상 결장 후 불꽃같이 극복하며 빙판 위에 등장했다.
자칫 아이스하키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는데 잘 이겨낸 것이다. 메이저리그(MLB)의 오타니 쇼헤이가 일본을 미국에 알리는 영웅이듯 오비는 NHL에서 러시아를 알리는 영웅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