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형형색색 깃발들이 펄럭였다. 이번엔 집회가 아니었다. 봄날의 달리기 축제 ‘2025 서울하프마라톤(서울특별시·조선일보사·서울특별시체육회 공동 주최)’에 나서는 ‘러닝 크루(running crew·달리기 팀)’들이었다. 이들은 대회마다 개성 넘치는 깃발들을 들고 나타난다. 같이 모여 달리려고 깃발 아래 모인다.
젊은 세대 달리기 열풍이 달아오른 지는 꽤 됐지만 그 열기는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 뜨거워진다. 이번 대회 전체 참가자 중 ‘2030’ 비율은 역대 최고였다. 2023년 서울하프마라톤 참가자 중 2030이 59%(1만2729명 중 7551명)였는데, 2년 뒤인 올해는 71%(2만1700명 중 1만5535명)로 참가자 수와 비율 모두 급등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걸까. 기성세대는 2030을 집단주의가 아닌 개인주의에 집착하는 연령으로 치부하지만 획일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달리기가 단체와 개인 종목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세대는 기본적으로 뭔가 혼자 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본능도 있다. (달리기는) 혼자 할 수 있어 남 영향을 안 받지만 같이 달리면 외로움도 덜고 공동 운명체 같은 느낌을 줘서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진단했다. 기성세대가 축구 같은 단체 구기 종목에 집착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달리기 열풍에 마중물이 된 건 ‘크루 문화’다. 길거리나 공원, 공공 운동장마다 무리를 지어 달리는 크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져 행정 기관에 민원이 들어올 정도다.
‘이콩콩일’ 크루는 2001년생 동갑내기들이 모여 지난해 탄생했다. 회장 오준서(24)씨는 “원래 수영을 즐겼는데, 함께 수다도 떨면서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달리기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명이 만든 크루가 지금은 30명을 넘어간다”고 했다. 서울 노원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노크’ 회원 이송희(31)씨는 “혼자였으면 그냥 힘들어서 포기했을 거리를 같이 뛰니 꾹 참고 뛰면서 실력도 늘었다”며 “올해는 하프코스로 체력을 다진 다음 내년부터 풀코스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오씨와 이씨 둘 다 이번 대회 하프코스를 끝까지 달렸다.
달리기는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감)’가 뛰어나다는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 취업 준비생 현지송(25)씨는 하루 일과가 온통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하는 데 대부분 쓰인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면 나가서 뛴다. 거리가 주로(走路)가 되며 장비는 10만원대 러닝화면 충분하다. 현씨는 “일주일에 3번씩 5km가량 뛴다. 나 같은 ‘취준생’에게는 이보다 가심비 좋은 취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2030세대가 꾸준히 즐기기에 시간과 비용이 가장 적게 들어가는 운동이 달리기”라고 했다. 현씨는 이날 10km를 완주했다.
별다른 기술 연마가 필요 없다는 점도 매력이다. 이날 10km를 완주한 김수민(26·여)씨는 학창 시절부터 야구나 축구에 관심이 많았지만 키가 작은 편(151cm)이라 자리를 잡긴 쉽지 않았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무게가 늘어날수록 버거웠다. 그렇지만 달리기는 이런 신체적 한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처음으로 ‘나도 운동을 잘할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지금은 일주일에 3번 이상 1회에 5~10km를 뛸 정도로 달리기에 푹 빠졌다.
키 190cm에 몸무게가 115kg인 윤진영(34)씨는 “옛날부터 과체중인데, 운동만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전부 걱정을 했다”며 “그렇지만 달리기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했다. 몸무게를 빼려고 달리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요즘 살이 빠졌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다”고 했다. 윤씨는 이날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이영애 교수는 “달리기는 다른 운동과 달리 복잡한 규칙이나 전술, 역할에 따른 의무감이 덜한 종목이라 젊은 세대 성정에 잘 맞는다”면서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