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피겨킹’ - 미국의 네이선 첸이 10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마치고 기뻐하는 모습. 금메달을 따낸 그는 “이 정도까지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첸은 우주의 별들이 그려진 붉은색과 보라색 의상을 입고 ‘로켓맨’ 등 엘턴 존 음악에 맞춰 연기를 펼쳤다. 의상은 유명 패션 디자이너 베라 왕이 디자인했다. /AFP 연합뉴스

0.7초쯤 되는 시간에 네이선 첸(23·미국)은 공중에 뜬 채 4바퀴를 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지 않으면 몇 바퀴인지 알아채기 힘들 만큼 빠르고 정확하다. 그 어려운 일을 쉬워 보이게 해낸다고 붙은 별명이 ‘쿼드 킹(4회전의 왕)’이다. 올림픽만 빼고 모든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던 그가 마침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첸은 218.63점을 받았다. 이틀 전 쇼트프로그램 점수(113.97점)를 더해 총점은 332.60점. 은메달 가기야마 유마(19·일본·310.05점)를 20점 넘게 따돌린 압도적 우승이다. 쇼트에선 세계 최고점 기록을 세웠고, 프리 점수와 총점은 자신이 보유한 세계 최고점에 약간 모자랐다. 4회전 점프를 쇼트 2번, 프리에서 5번 성공했다.

첸의 부모는 중국에서 온 이민자다. 5남매 중 막내인 첸은 2002 동계올림픽 유산이 남아 있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만 3세 때 스케이트를 처음 신었다. 하키⋅발레⋅체조⋅피아노⋅바이올린 등 형과 누나들이 하는 걸 다 따라 해 봤다. 체조와 발레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피겨에 빠져들었다.

열 살 때 스케이트 코치가 “그런 재능을 본 적이 없다”고 했을 만큼 첸은 운동 능력을 타고났다. 나이에 맞지 않는 기술을 해내고선 “이게 어려워야 하는 건가요”라고 진지하게 묻는 전형적인 천재였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교사는 그에 대해 “매우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히 자기 할 일을 다 해낸다”고 했다. 성실하고 차분한 성격에 못 말리는 완벽주의자였다.

2018 평창올림픽 때도 첸은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쇼트 17위에 머물고는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다 했다”며 아쉬워했다. 올림픽 무대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프리 1위에 올랐으나 최종 5위로 마무리했다. 이 실패의 기억을 넘어서는 것이 베이징올림픽에서 그가 풀어야 할 최대 과제였다.

첸은 2018년 가을 통계학·데이터과학 전공으로 예일대에 입학했다. 오전 수업을 듣고, 교내 링크장에서 90분간 피겨 훈련을 한 뒤, 인근 지역 링크장으로 이동해 90분 더 훈련하고, 저녁에 학교로 돌아와 토론에 참여하고 과제하는 생활을 2년간 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코치에게는 화상으로 도움 받았다. 그러다 국제 대회가 있으면 날아가서 우승하고 돌아와 중간고사를 치렀다.

예일대 생활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진짜 세상이 어떤 곳인지 좀 더 보게 됐다. 나 자신, 내가 속한 곳, 긍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다.” 올림픽을 본격 준비하려고 2년 전 휴학했다. 올해 복학 후 공부할 교과서를 미리 읽고 있다고 한다.

평창올림픽에서 겪은 실패와 대학 생활 경험을 통해 그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됐다고 했다. “좋아서 피겨를 하는 거지, 우승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올림픽에 나가는 건 아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선수로서 물론 중요한 목표이지만, 메달을 못 딴다고 인간으로서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담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나, 삶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영원히 피겨를 할 것이 아니므로, 한정된 기회를 제대로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로켓맨’ 등 엘턴 존의 음악에 맞춰 프리스케이팅 후반 스텝을 밟을 때, 그는 이번 올림픽과 다시 오지 않는 그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쿼드러플 악셀(공중 4회전 반) 점프에 도전한 하뉴 유즈루(28·일본)는 올림픽 3연패를 이루지 못한 채 4위(283.21점)에 머물렀다. 쿼드러플 악셀을 시도하다 넘어졌고, 이어진 4회전 점프에서 다시 넘어졌다. 첸과 세기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으나, 하뉴가 쇼트에서 점프 하나를 아예 뛰지 못하는 큰 실수를 해 일찌감치 맥이 빠졌다.

2014·2018 올림픽 2연패 후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는 하뉴는 쿼드러플 악셀이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새 목표를 찾았다. 포기하지 않은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뉴와 첸 서로의 존재가 지금껏 그들을 성장하게 했고, 피겨스케이팅을 이전과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