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경기가 끝나자, 꾹 눌러온 감정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2등은 다시는 피겨 안 할 거라고 소리 질렀고, 도핑 논란에 휩싸인 4등은 경기를 망치고 펑펑 울었다. 코치는 4등이 스케이트를 벗기도 전에 질책하기 시작했다. 1등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소속이다.

러시아의 카밀라 발리예바가 17일 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점수가 발표되자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다./AFP 연합뉴스

17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 경기장에서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끝났다. 도핑 조사를 받고 있으면서도 출전이 허용된 카밀라 발리예바(15)는 지난 몇 달간 세계 최고점을 수차례 경신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여러 번 넘어졌고 자주 균형을 잃었다.

'손가락 욕' 의혹까지… - 알렉산드라 트루소바가 시상식에서 베이징 올림픽 마스코트 빙둔둔을 들고 있다. 가운뎃손가락을 펴고 있어 은메달 결과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그가 혹시 의도한 동작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정재근 스포츠조선 기자

지난 15일 쇼트프로그램 1위에 올라 가장 마지막 순서로 프리 경기에 나선 발리예바는 결국 총점 4위(224.09점)로 내려앉아 메달을 따지 못했다. 4회전 점프를 두 번 뛴 안나 셰르바코바(17)가 우아한 연기로 금메달(255.95점)을 차지했다. 대담하고 공격적인 연기를 펼친 알렉산드라 트루소바(17)는 4회전 점프를 무려 다섯 번이나 뛰어 프리 1위에 올랐으나, 쇼트 성적(4위)이 저조해 총점에서 2위(251.73점)로 밀렸다.

전 세계의 비난을 짊어진 발리예바는 음악이 멈춘 순간부터 눈물을 터뜨렸다. 빙판을 벗어날 때 예테리 투트베리제(47) 코치가 다가왔지만 안아주지는 않았다. “왜 포기했어? 왜 싸움을 멈췄어? 나한테 설명해봐. 왜 그랬어?” 대답 없던 발리예바는 실망스러운 점수가 발표되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동안 오열했다.

러시아의 카밀라 발리예바가 17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 도중 넘어지고 있다./EPA 연합뉴스

그때 은메달이 확정된 트루소바도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모두가 금메달을 가졌어. 모두가. 나만 없어. 나는 스케이트를 증오해. 절대로 다시는 빙판에 안 나갈 거야. 절대로!” 그는 한때 시상대에 오르는 것도 거부하다가 마스카라 번진 눈으로 2위 자리에 올라섰다.

트루소바는 고난도 기술을 점점 더 많이 시도해왔는데도 지난 몇 년간 메이저 대회 우승을 못 해봤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그는 2018·2019 주니어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시니어 무대에선 2019 그랑프리 파이널, 2020·2022 유럽선수권, 2021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동메달에 그쳤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트루소바가 17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은메달이 확정되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은 4회전 점프를 추가했다. 그런데도 우승을 하지 못해 화가 났다. (결과에 대해) 행복은 없다.” 그나마 “4회전 점프 다섯개를 뛴 것은 매우 기쁘다. 이걸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성취가 매우 자랑스럽다”고 했다. 경쟁심이 워낙 강한 트루소바는 예전에도 “1등을 하는 것이 승리다. 그 외엔 모두 패배”라고 말했다고 한다.

셰르바코바는 이날 가장 큰 영광의 주인공이 됐어야 했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세계선수권 챔피언인데도, 몇 달 전 등장한 발리예바에 밀려 은이나 동 후보로 평가 받았다. 셰르바코바는 기자회견에서 “한편으로는 무척 행복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허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 현장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린 사람은 예상치 못한 동메달을 따낸 일본의 사카모토 가오리(22)였다.

17일 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플라워 세리머니가 열렸다. 왼쪽부터 은메달을 딴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금메달의 안나 셰르바코바, 동메달리스트 일본의 사카모토 가오리./로이터 연합뉴스

이날 경기를 TV로 봤다는 토마스 바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발리예바를 측근들이 무척 냉담하게 대하더라. 섬뜩했다”고 말했다. 중계방송 해설을 맡은 전 미국 남자 피겨 선수 조니 위어(37)는 “가장 기이하고 가슴 미어지는 경기였다”고 했다.

러시아의 피겨스케이팅 코치 예테리 투트베리제(가운데)가 17일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TASS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