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점을 알리는 불이 들어오자, 검객은 엎드려 울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쥔 손끝이 푸른색과 노란색 매니큐어로 물들어 있었다. 887일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조국, 우크라이나의 상징 색이었다.
29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 3위 결정전. 우크라이나 펜싱선수 올하 하를란(34)이 최세빈(24·전남도청)에게 15대14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열린 첫 올림픽에서 우크라이나가 획득한 첫 메달이다.
경기는 쉽지 않았다. 최세빈은 2라운드까지 11-5로 앞서면서 격차를 벌렸다. 그러나 이후 하를란이 내리 점수를 냈고, 11-12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 뒤로 한 점씩을 주고받으면서 14-14 동점 상황까지 갔다. 마지막 일격(一擊). 두 사람 모두에게 점수 획득을 알리는 불이 들어왔지만, 하를란은 자신의 승리를 예측한 듯 피스트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열했다. 이후 비디오 판독을 마친 심판진이 하를란의 승리를 선언하자, 그는 최세빈과 인사를 나누고는 코치와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관중석에서는 기립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이를 의식한듯, 하를란은 우크라이나 국기 색으로 칠한 자신의 마스크를 가리키며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우크라이나, 사랑하는 나의 조국. 이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를란은 우크라이나 펜싱의 ‘간판 스타’다. 열 살에 처음 펜싱 검을 손에 쥐었던 그는 형편이 어려워 남의 신발과 슈트를 빌려가며 훈련을 했다. 타고난 재능과 근성으로 불과 4년 만에 우크라이나 국가대표가 됐다. 이후 2008 베이징올림픽 사브르 여자 단체전 금메달, 4년 뒤 런던올림픽에선 개인전 동메달을 차지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선 단체전 은메달,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동메달은 그의 통산 다섯 번째 올림픽 메달.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값졌다. 경기 직후 그는 “(나의 승리는) 러시아에 살해돼 파리에 올 수 없었던 우크라이나 선수들을 위한 승리다. 또 우크라이나를 대표해 올림픽에 출전한 동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우크라이나 선수는 총 26종목 140명. 역대 가장 적은 규모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선수가 최소 487명에 달한다”고 했다.
여느 우크라이나인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하를란에게도 시련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흑해 항구도시 미콜라이우는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의 집중 폭격에 시달렸다. 가디언에 따르면, 하를란의 부모님은 공습을 피해 지하실에서 수 개월씩 밤을 지새웠다. 하를란도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겨우 훈련을 지속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남기를 선택한 부모님 얼굴을 본 것은 2년 반 동안 손에 꼽을 정도. 하를란의 소셜미디어에는 지난 5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그를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모습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선수 생활에도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하를란은 러시아 선수 안나 스미르노바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경기 종료 후 악수를 거부하면서 실격 처리됐다. 이에 세계 랭킹 포인트를 획득하지 못하면서 파리 올림픽 참가 역시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우크라이나 측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기한 항소가 받아들여지면서 가까스로 파리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꿋꿋했다. 올림픽 준비에 전념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소셜미디어에 조국을 향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지난 8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대적인 미사일 공습을 했을 때는 “이것이 러시아의 진정한 얼굴”이라며 “여기에는 어떤 평화도 없고 오직 살인과 파괴만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인정해야 한다”고 쓰기도 했다.
하를란의 동메달은 긴 전쟁으로 지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희망의 상징’이 됐다. 메달이 확정되자 경기장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한마음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경기장 기자석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를 외치는 소리로 가득찼다. 올림픽 경기장을 찾은 기자들이 직접 소리 내 응원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초반에 벌어졌던 점수를 하를란이 한 점씩 쫓아가자 여기저기서 응원이 삐져나왔다. 점점 커진 소리는 승리를 확정지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다른 나라 기자들도 기립 박수를 치며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축하했다. 역시 올림픽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 한 중년 여성 기자는 “우리에겐 이 메달이 너무 간절했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했다”면서 눈물을 훔쳤다.
이날 관중석에서 딸을 지켜보던 하를란의 어머니는 한달음에 내려와 그를 껴안았다.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다른 종목 우크라이나 선수들도 하를란을 껴안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경기를 관람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도 하를란을 찾아 격려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 테티애나 던포드는 “하를란은 우리의 영웅”이라며 “조국을 대표하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썼다.
시상식이 끝난 후 열린 공식 기자회견. 한 기자가 하를란에게 “당신은 어디서 힘을 얻느냐”고 물었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강인합니다” “나의 메달은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우크라이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