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량이 좋았을 때의 이대훈, 열심히 했던 이대훈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태권왕’ 이대훈이 25일 도쿄에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도쿄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뒤 “이 경기가 국가대표로서,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취재진 질문에 “이번 대회에서 예전의 이대훈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량이 떨어진 이대훈으로 기억될까 봐 걱정됐다”며 “잘했을 때의 이대훈, 열심히 했던 선수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대훈은 이날 열린 도쿄올림픽 태권도 남자 68kg급 동메달 결정전(지바 마쿠하리 메세 A홀)에서 자오 슈아이(중국)에게 15대17로 졌다. 한국 남자 태권도 최초의 3회 연속 메달 수확에도 실패했다. 그는 앞서 2012 런던 대회에서 은(58kg급), 2016 리우 대회에선 동메달(68kg급)을 걸며 남자 최초로 2회 연속 수상에 성공했다. 이대훈은 “가족들에게 ‘메달 하나 들고 간다’고 얘기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모든 분들께도 같은 마음으로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했다.
세계 랭킹 1위인 이대훈은 이날 첫 경기인 16강전에서 올림픽 참가자 17명 중 17위인 울루그벡 라시토프(우즈베키스탄)에게 연장전 끝에 19대21로 졌다. 충격이 큰 듯 그는 숙인 고개를 쉽게 들지 못했다.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라시토프가 결승에 오른 덕에 패자부활전 참가 자격을 얻은 그는 1차 패자부활전(오후 7시), 2차 패자부활전(7시 56분),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9시 15분)까지 약 2시간 반 안에 세 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에 나섰다. 태권도에선 결승 진출자에게 졌던 모든 선수가 함께 패자부활전을 치른다. 16강전 패자 이대훈은 예선전 패자 세이두 포파나(말리)를 11대9로, 8강전 패자 미르하셈 호세이니(이란)를 30대21로 누르고 2차에 걸친 패자부활전을 통과했다.
하지만 체력은 결국 이대훈의 발목을 잡았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대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오 슈아이에게 근소하게 끌려 다니다 경기 막판 마지막 힘을 짜냈지만 역전에 실패했다. 경기 후 그는 밝은 얼굴로 상대 선수를 축하해 준 뒤 코트 계단에 앉아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퇴장했다. 그를 이겼던 라시토프는 금메달을 땄다.
이대훈은 “첫 경기에서 신예에게 크게 이기다가 무너지다 보니까 자신감이 떨어졌다. 패자부활전에 올라가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응원해 주신 분들께 좋은 경기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자부활전 경기 수가 많았다. 고생 많이 하고 지면 속상할 것 같았고, 그래서 동메달을 딴다면 금메달만큼 기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 작년에 가족, 감독 선생님과 상의를 해 올해 은퇴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원래 계획은 연기되기 전 작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뒤 올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대회에 출전하며 자연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며 이 대회가 은퇴 무대가 됐다. 이대훈은 “지금까지 아시안게임이나 세계선수권에서는 모두 우승을 해봤고, 제가 잘 못한 대회가 올림픽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대회는 제게 큰 의미가 없다”며 “한 번 더 올림픽에 나가는 것도 버겁다”고 했다.
그는 2011·2013·2017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고, 2010·2014·2018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연속으로 정상에 올랐다. 딱 하나, 올림픽 금메달이 부족했지만, 도쿄에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이대훈은 이제 은퇴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진로에 대해 그는 “트레이닝 지식을 쌓으며 부족한 공부를 하고 싶다. 좋은 선수를 육성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태권도는 대회 이틀째까지 노메달 부진에 빠져 있다. 모든 경기를 마친 이대훈은 “어제오늘 태권도 대표팀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남은 선수들을 믿는다. 나도 대표팀 일원으로서 선수들이 메달을 딸 수 있도록 서포트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