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구려 건국자 궁예(弓裔)는 애꾸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명한 눈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역사에 기록된 바는 없다.
궁예의 초상이 정부 표준영정 지정 추진 중인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표준영정은 정부가 공식 인증하는 위인의 초상화로, 궁예 표준영정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정동상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제작 승인을 얻었고, 현재 채색 작업만 남겨둔 상태다. 해당 영정 속 궁예는 왼쪽 눈에 안대를 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림을 제작 중인 한국화가 권오창(73)씨는 본지 통화에서 “궁예의 얼굴을 특정할 사료는 없지만 신라 왕족 출신임을 감안해 골상(骨相)을 추정했다”며 “안대 위치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르자는 심의위 의견을 반영했다”고 했다.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상태에서 일종의 상상화가 국가 공인 초상으로 제작되는 것이기에 논란이 예상된다.
표준영정 제도는 역사적 인물의 영정이 조잡하고 무분별하게 창작·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73년 도입됐다. 추후 교과서에 실리거나 화폐 도안으로 활용될 수 있기에 심의 규정상 “민족적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궁예가 과연 이 기준에 부합하는지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비록 승자의 기록이기는 하나 ‘삼국사기’ 등 정사(正史)에서 궁예는 폭군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한 심의위원은 “궁예의 긍정적 면모를 재해석하는 학계의 여러 움직임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번 표준영정 제작을 주도하는 강원도 철원군청 측은 “그림이 완성되면 현재 건립 추진 중인 사당에 봉안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 14일에는 표준영정 100호로 지정된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새 어진(御眞)이 공개됐다. 기존 어진이나 얼굴을 추정할 다른 그림이 없어 상당 부분 상상이 개입하는 추사(追寫) 방식으로 제작됐는데, 이 때문에 심의 과정에서 한 위원이 “(표준영정 채택 시도가) 가짜가 다른 가짜를 공인인증서 가지고 누르려는 것 아니냐”며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단종 그림 역시 권오창 화가가 세조 어진 및 조선왕조실록 등을 참고해 그렸다. 온라인에서는 “제사 지내면 저 어진 닮은 엉뚱한 혼백이 내려와 제삿밥 잡수시겠다” 등 대중의 비아냥이 쏟아졌다. 영정 제작을 진행한 강원도 영월군청에 따르면 사업 예산은 2억원으로, 그림 제작비에만 군비 1억원이 투입됐다.
표준영정 제도는 고증 문제, 화가의 친일 경력 등 끊임없는 구설에 시달려왔다. 특히 ‘표준’이라는 위상 탓에 국민 감정에도 부합해야 한다. 표준영정을 향한 가장 빈번한 지적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1986년 제작된 유관순 영정 역시 “중년 여성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잇따라 결국 교체됐다. 2007년 교체 당시 심의위는 “옥중 고문으로 얼굴이 부은 수형자 기록표 사진을 참고한 기존 영정이 중년 여성의 수심 깊은 얼굴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다”며 “10대 소녀의 청순하고 진취적인 기개가 담긴 새 표준영정 채택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밝혔다.
표준영정 폐지론이 나오는 이유다. 입맛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는 영정에 ‘표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한 유명 한국화가는 “사실성보다 여러 이해관계와 취향이 크게 작용한다면 제대로 된 초상이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물론 초상화 전문가 양성 및 전통 복식 연구 기여 등의 순기능과 해당 그림을 문화·관광 사업에 활용하려는 지자체 수요도 존재하는 만큼, 50년 역사의 표준영정 제도 운영에 대한 숙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