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토박이인 소설가 안회남은 서른일곱살에 이런 글을 썼다. ‘요새도 나는 매일같이 한강에 나간다.심하면 비오는 날에도 나간다. 그곳은 나를 길러주었고 나는 그속에서 싱싱하게 자라난 까닭이다.’(‘나를 길러준 한강水’, 女性 1936년9월호)
◇소설가 안회남의 ‘한강 예찬’
안회남에게 ‘수영을 하기에도 물은 부족하지 않고, 일광(日光)도 어디와 마찬가지로 뜨겁고 신체에 유익’한 곳이 한강이었다. 그는 별나게도 ‘한강 물 먹기를 썩 좋아한다’고 썼다 ‘이상한 버릇이라면 꽤 기특하고 묘한 놈의 한가지이다. 백사장에 누웠다가 목이 컬컬하고 그야말로 물이 고프면 나는 한강 중턱에까지 나가서 입을 벌리고는 꼭 세번 다물어 꿀꺽꿀꺽 삼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헤엄을 쳐서 다시 온다. 그 습관이 커져서 그런지 나는 더우면 한강이 생각나고 한강물이 먹고싶고 한 것이다.’
◇일본인 자제들이 단련한 서빙고 수영장
한강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름 피서지였다. 선비들이 옷 벗고 멱감았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체면치레 할 필요없는 평민이나 아이들은 더위를 피해 물에 뛰어들었다. 한강에 수영 구획을 정하고, 탈의장과 세면소, 다이빙대 등을 갖춘 근대적 수영장이 들어선 것은 1910년대부터다.
서빙고 앞 한강변에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수영장이 설치됐다. 1916년 8월1일부터 20일간 개장한 한강철교 상류의 서빙고 수영장에선 경성부내 각 소학교 5년 이상의 생도 600명 이상이 수영 연습을 했다. 서빙고 수영장은 1920년대 초중반까지 경성부민의 유일한 한강수영장이었다.
◇경성부 한강인도교 수영장
1925년부터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 사이에 수영장을 설치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기차가 달리고, 야간엔 전등이 반짝이는 다리는 당시 대단한 볼거리였다. 경성부가 용산경찰서와 협력해 수영장을 개설한 것은 1929년 여름이다. 그해 7월24일 폭 109m, 길이 45m의 수영장이 개장했다. 위험방지 경계선을 비롯, 탈의장과 세면소, 다이빙대가 설치됐다. 1933년부터는 인도교 상류 600m 지점, 즉 현재의 이촌한강공원에 길이 150 m, 폭 50 m의 수영장을 만들었고, 이듬해부터 매년 여름 인도교 상류 500 m지점부터 약 3000평 땅에 부영 수영장을 개설했다.
◇혁신 조선일보, 1933년 한강 특설 수영장 개설
‘억센 조선의 건설을 표어로 하는 본사에서는 경성시내의 독자들을 위하야 금하 한강강변에 수영장과 일광욕장을 특설하고 누구나 자유로 입장하야 마음껏 심신을 단련할 기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조선일보는 1933년 6월27일 조간 1면에 ‘한강수영·일광욕대회’사고(社告)를 냈다. 한강 인도교 수영장에 특설구역을 만들고 수영장과 일광욕장을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탈의장과 세면대, 화장실 같은 기초시설은 물론 라디오와 축음기, 독서장에 목마, 그네까지 갖춰 남녀노소가 즐기는 장소였다. 수영장 개장전 경성공회당에서 수영과 일광욕의 유용성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한강 수영장 특설은 방응모 사장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펼친 독자 서비스였다. ‘한강수영장’은 태풍 탓에 예정보다 며칠 늦은 7월23일 개장했다. ‘이날의 성황을 질투하는 음침한 하늘위에 흩어졌다가도 뭉치는 검은 구름장과 고요한 강면에 거친 물결을 일으키는 축축한 바람도 가리지 않고’(7월24일 ‘한강반에 개장된 일광욕수영장, 작일 성대히 개장’) 인파가 몰려들었다.
◇'부인들이 건강치 못하면 불행의 원인’
한 주 뒤엔 가정면에 ‘억센 조선을 세우자-부인도 한강에 오시라’(7월29일)는 기사가 나갔다. ‘조선 가정에서는 여름이 되면 흔히 남자들만 강변이나 해변으로 피서를 하지만 부인들은 대개 골방에서 종일 땀을 흘리며 지나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남자들만 튼튼하고 부인들이 건강치못하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이어 ‘깨끗한 공기와 바람, 햇빛을 쏘이면 몸이 건강해진다’며 여성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여성용 탈의실과 휴게실을 따로 만들고, 수영에 익숙치않은 여성들을 위해 일일히 구명대를 나눠줬다. 조선체육회 산하 조선수영장려회 주최로 수영강습도 열어 근대 스포츠로서의 수영을 전파했다.
◇'조선은 약하다. 줄잡아서 억세지 못하다’
조선일보는 1932년1월1일자 신년호에 ‘억센 조선의 건설’을 내걸었다. ‘억센 조선의 건설은 우리의 큰 구호의 하나가 되어야한다. 조선은 약하다. 줄잡아서 억세지 못하다. 못먹고 못입고 못살아서 약하니 가난하여 약한 것이오, 못배워서 약하니 지식으로 약한 것이오, 뛰고닷고 밀고 나가고 잡아나꾸기에 약하니 체육에 약하고 단련이 약한 것이다.’ 신문은 ‘억센 조선’을 위해 보건의료와 민중체육을 강화할 것을 제시했다.
조선일보는 1933년7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기 민중체조반’을 만들어 천도교기념관과 청년회관에서 강습회를 열었다. 학생 183명이 지방에 내려가 ‘일반 민중에게 정신적 단련과 단체훈련을 겸한 체육 건강의 기술을 지도’했다. 장흥 수문포 해수욕장, 상주 농잠학교 운동장을 비롯 서흥, 함흥, 청진, 신천에서도 체조 강습이 열렸다. 이듬해 여름 한강수영장 개설은 ‘억센 조선’을 만들기 위한 운동중 하나였다.
◇코로나 19로 문닫은 한강수영장
뚝섬에도 1934년 7월 수영장이 개설됐다. 한강 수영장은 광복 이후에도 살아남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로 수질오염이 가속화되면서 1969년 폐쇄됐다. 수질 오염에 더해 지금의 노들섬(중지도)개발 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도 비교적 물이 깨끗한 뚝섬이나 광나루에서 간간히 수영이 허용됐으나 수영객은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 한강 개발이 시작되면서 공원이 조성되고 수영장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1000만 서울 시민의 알뜰 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다. 그 한강 수영장이 올 여름엔 개장조차 못했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린 탓이다. 뚝섬(수용인원 3500명), 여의도(3600명), 광나루(1200명), 망원(3300명), 잠실(3400명), 잠원(3000명) 등 수영장 6곳과 난지(1100명), 양화(600명) 등 물놀이장 2곳까지 합하면 한번에 2만명이 피서를 즐기던 명소가 사라져버렸다. 코로나 19가 100년 전부터 이어진 한강 수영장의 즐거움까지 앗아가버린 것이다.
참고
김윤정,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름나기-한강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서울책방, 2018
안회남, ‘나를 길러준 한강수’, 女性 1936년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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