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2심까지 실형이 선고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현 정부 청와대를 향한 사실상 첫 수사였던 만큼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사팀인 한찬식 동부지검장, 권순철 동부지검 차장, 주진우 형사 6부장은 모두 수사 이후 인사 불이익을 입고 검찰을 떠났다. 남아 있는 수사팀도 인력 부족을 겪으며 힘겹게 재판을 이끌어 가고 있다. 한찬식 전 동부지검장은 “재판까지 이끌어 온 검사들이 정말 대단하다. 유형·무형의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대검이 사건 초반부터 법리검토 계속 요구”
이 사건은 2018년 청와대 특감반 소속이었던 김태우 전 수사관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폭로하면서 불거졌다. 하지만 수사 초반부터 대검의 견제를 받았다. 한 전 지검장은 본지 통화에서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검이 직권남용 성립 여부에 대한 법리검토를 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이 전(前) 정권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 기관 임원들에게 사직을 강요하는 등의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하라는 지시였다. 당시 특수수사를 총괄하는 대검 반부패부장은 이성윤 서울고검장이다. 지난 5월 ‘김학의 불법출금’ 수사를 가로막은 혐의로 기소돼 피고인 신분이 된 그는 이후 검찰 고위간부 인사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했다.
주진우 전 부장검사도 “대검 반부패부에서 법리는 불론 수사 방법까지 간섭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았다”고 했다. 그는 “대검에서 일선 수사에 이렇게까지 관여하나 싶었다. 매번 수사를 제한하는 의견만 냈기 때문에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고 했다.
권순철 전 차장검사도 “법리검토를 여러 번, 여러 절차로 요구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이 같은 요구가 정권 차원의 외압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그건 아닌 것 같다. 대검과 법무부에서 심도 있게 검토를 요구했다”고 했다.
◇청와대 거부로 압수수색 실패, ‘윗선’ 수사 가로막혀
이 사건은 청와대와 환경부가 전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을 쫓아 내고 자기 편을 꽂아 넣는 과정에서 내정 인사의 합격을 위해 점수를 고치고, 자기소개서도 대신 써준 정권 차원의 ‘채용 비리’ 사건이다. 하지만 기소된 청와대 인사는 신미숙 전 균형인사비서관이 유일하다. 1·2심 재판부는 “청와대 비서관이 단독으로 내정자를 확정하고 그에 대한 지원결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신 전 비서관 ‘윗선’을 지목했지만, 수사는 거기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최순실 일파의 국정 농단’을 운운했던 서울동부지법은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도 족족 기각했다. 주 전 부장검사는 “청와대에 대한 마지막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면서 더 이상 수사 동력이 없다고 봤다”고 했다. 실무 책임자로서 조사 후 면죄부를 주는 것보다 추가 단서가 확보되면 수사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 두 사람 기소 선에서 수사를 접었다는 것이다.
일부 발부된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보안을 이유로 집행을 거부했다. 한 전 지검장은 “인사수석실 압수수색을 통해 인사 심의자료를 확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밝혔다. 수사팀은 조현옥 당시 청와대 인사수석을 조사하려 했지만 ‘조사해도 기소가 어려울 것’이라는 대검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한 전 지검장은 “조사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검찰 내부망에 남겨 뒀다”고 했다.
◇수사 후 줄줄이 좌천인사, 수뇌부는 모두 옷 벗어
‘환경부 블랙리스트’ 기소 후 2019년 8월 검찰 정기인사에서 한찬식 지검장은 고검장 승진에서 탈락했다. 권순철 차장은 한직인 서울고검 검사로, 주진우 부장검사는 검사 5명이 근무하는 안동지청으로 발령났다. 이들은 모두 옷을 벗었다.
권순철 전 차장(변호사)는 ‘좌천 인사’에 대해 “정권에 반하는 수사를 했을 때는 어느 정권이나 그래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현 정권이 ‘촛불정권’으로 제대로 할 것처럼 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문제된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사직 강요 및 친정권 인사들에 대한 선발 특혜는 노무현 대통령 때 만들어진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 편’에 대한 낙하산 인사를 막기 위해 공기업 인사 절차와 요건을 정한 법이다. 권 전 차장도 이점을 지적했다. 그는 “어느 정권에서나 공기업 인사에서 자기네 편 인사를 끌어들이기 위한 인사를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라며 “노무현 정권을 계승한 현 정부에서 그걸(법 정신에)정면으로 위반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재판 담당 검사 ‘인력 빼내기’까지, 남은 검사들도 악전고투
2019년 4월 기소된 이 사건은 2심 결론까지 2년 5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검찰을 떠난 수뇌부를 대신해 당시 부부장검사와 말석(末席)이던 수사검사들이 재판을 이끌어 왔다.
한 관계자는 “재판에 참여하는 검사를 다른 곳으로 파견 보내고, ‘인력을 빼가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건을 수사한 검사가 아니면 공소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다섯 명의 공판팀이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재판 때마다 제주, 광주, 남원 등 전국에 흩어진 검사들이 모여 신문 사항을 만들고 의견서를 써 냈다.
2심은 김 전 장관에게 실형(징역 2년)을 선고했지만 일부 직권남용 혐의와 업무방해, 강요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이 관계자는 “이 사건의 본질은 ‘채용비리’임에도 다른 채용비리 사건들과 달리 업무방해를 무죄로 봤다”며 “법원 판단은 존중하지만, 법리적인 견해차이가 있어 상고를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