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대형 미술관이 피카소와 앤디워홀 작품 120억원어치를 중개 판매했다가 법정 분쟁에 휘말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술계가 술렁이고 있다. 위작·사기 의혹을 떠나, 비영리기관인 미술관이 화랑이 하는 미술품 거래를 중개한 것 자체가 초유의 일이라는 반응이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가 지난달 29일 성명을 냈다.
모 사립미술관이 화랑(갤러리), 아트딜러의 업무인 미술품 매매·알선·중개 등의 행위, 권한을 넘어선 진품보증서 발급 행위, 더 나아가 불투명한 거래를 통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문제가 된 미술관은 협회 회원관은 아니지만 해당 미술관 측에 이번 사태에 대한 명확한 해명과 조속한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화랑협회장을 지낸 화랑계 원로 A씨는 “일부 사립미술관에서 미술품 거래를 한다는 이야기는 있어왔지만 이번 사건은 좀 심각해 보인다”며 “미술관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면 그에 걸맞게 운영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일이 왜 미술계를 들썩이게 만들었을까.
◇미술관과 갤러리의 차이점은?
미술관은 그림 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화랑(갤러리)과는 다르다. 미술관은 그림을 판매하지 않는 대신, 입장료와 아트상품 판매금, 기부금 등을 수입원으로 한다.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벌이다. 그래서 비영리기관이라 부른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르면, 미술관은 문화·예술·학문의 발전과 문화향유, 평생교육을 목적으로 미술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이다. 이 가운데 사립미술관은 개인이나 단체, 법인이 운영할 수 있고, 시·도지사에게 등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지난해 기준 등록된 국내 미술관은 271곳, 이중 사립미술관이 179곳으로 67%나 차지한다. 등록이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등록한 미술관에는 취득세·재산세 등 세금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설립 목적을 위반해 미술관 자료를 취득·알선·중개·관리한 경우엔 시·도지사가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국공립을 포함해 국내 미술관은 10년전보다 120개가 늘었다. 국민 문화, 예술 수준이 높아진 덕이다.
◇“그림 중개라니”vs.“아니, 운영 법인이 한 것”
‘K현대미술관’은 지난해 5월 피카소 작품 10점과 앤디워홀 작품 28점 등 총 38점을 코스닥 상장사인 의료기기업체 ‘GTG웰니스’에 중개 판매했다. 구매한 회사의 회계감사를 맡은 한영회계법인이 ‘의견거절’을 내놓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양측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2017년 1월 개관한 이 미술관은 같은 해 5월 서울시에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했다. 대지 464평, 건물 약 1500평, 등록한 소장자료(주로 미술품)는 1180점이다. 운영주체를 관장 김모(55)씨 개인으로 등록했지만, ‘㈜연진케이’가 실제 미술관을 운영 중이다. 이 법인은 관장 김씨가 지분 100%를 가진 대표이사로 돼 있다. 임원은 김씨 배우자와 부모, 여동생 등이다.
㈜연진케이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GTG웰니스와의 이번 거래는 미술관이 아닌 연진케이가 한 것”라면서 “미술관은 공간과 관련 서비스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 “엄연히 회계가 구분돼 있고 연진케이 소유 건물에 미술관이 임대를 얻어 들어와 있는 형태”라면서 “내부적으로 임대료도 주고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GTG웰릭스 측에 제공한 진품증명 보증서, 작품보관확인증 등은 모두 미술관이 발급했다. GTG웰릭스 측은 “김 관장 부부는 공문이나 이메일 등의 서명란에 미술관과 연진케이를 혼용해 썼다”면서 “우리가 공문을 보낼 때도 수신처는 미술관, 참조처는 연진케이였다”고 했다.
◇끊이지 않는 미술관 논란... 저작권 침해도
미술관을 둘러싼 논란은 종종 일어난다. 지난 2013년 공립미술관인 대구미술관에서도 ‘미술품 거래 중개 의혹’이 불거졌었다. 한국큐레이터협회가 “김 모 관장이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팔아줘야 한다’며 컬렉터, 화랑 등과 접촉해 미술관 전시 출품작 거래를 중개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김 관장은 당시 ”작품을 출품한 갤러리 초대로 식사 자리에 갔더니 지역의 컬렉터 부부도 와 있었을 뿐 거래를 중개한 적 없다”며 “미술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었다. 관장의 사과와 시정 약속 등으로 논란은 일단락됐다.
K현대미술관이 지난 2019년 12월부터 4개월간 연 알렉산더 칼더 전시회도 잡음이 있었다. 당시 복제품을 일부 전시했다가 칼더재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 미술관은 항의를 받고 복제품을 철수시켰다. 칼더재단은 당시 “한국미술저작권관리협회(SACK)를 통해 복제품을 전시에서 제외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며 “작가의 저작권을 명백히 침해하고, 한국 관람객을 오도하는 작금의 상황을 크게 우려한다”고 했다. 2017년 설립 등록 때, 다른 미술관의 소장품을 빌려와 중복으로 등록하려다가 심의에 걸리기도 했다.
서울의 한 사립 미술관 관장은 “보통 등록한대로 개인이면 개인, 재단이면 재단이 운영하지 개인과 법인을 분리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라며 “설립 때부터 미술관과 화랑이 혼용된 모습으로 영리사업을 계획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 중개, 하면 안돼”vs.“금지조항 어딨나”
서울시 박물관과 관계자는 “미술관은 비영리기관이기 때문에 미술품 판매나 중개를 못하도록 돼 있다”며 “취소 사유가 발생하면 실사 후 심의를 거쳐 최종 취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병식 경희대 미대 객원교수는 “세계 어느나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미술품을 팔거나 중개하는 일은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국제박물관협의회 윤리강령도 ‘비영리(non-profit)’을 못박고 있다”면서 “현재는 협회가 자체 윤리규정, 윤리교육 등을 통해 올바른 운영을 위해 스스로 노력 중이지만, 빨리 정부가 나서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K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우리나라 법령이나 국제박물관협의회 윤리강령에 미술관의 영리 혹은 영업 행위를 금지하는 구체적인 조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