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한옥마을과 사적(史蹟) 경기전이 내려다보이는 2층 양옥집에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넓이 180㎡(약 55평) 정원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옥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명당(明堂)이었다. 이곳은 50여 년 전인 1971년부터 전북은행장, 전북도 부지사, 전북도지사 등이 살림집으로 쓰던 관사(官舍)다.
작년 7월 김관영 지사가 취임하면서 “관사를 도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약속했고 한 달간 관사를 어떻게 활용할지 도민 의견을 모았다. “게스트하우스로 쓰자” “매각해 예산에 보태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전북도는 이곳에 전시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전북에는 전시 공간이 부족해 도지사 관사를 다양한 전시·공연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전북도는 먼저 관사를 둘러싸고 있던 2m 높이의 담장부터 허물었다. 관사 1층은 미술 작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2층은 도지사의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정원에는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쉴 수 있는 쉼터와 야외 공연장을 만든다. 올해 안으로 완공하는 게 목표다. 관사를 전시관으로 바꾸는 데 4억6500만원이 들었다. 김 지사는 관사를 내주고 도청 근처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관사가 하나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미술관이나 도서관 등으로 리모델링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기도 한다. 31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 지자체장들이 쓰는 관사 수는 2019년 23곳에서 2023년 7곳으로 4년 사이 3분의 1 넘게 줄었다. 관사를 운영하는 지자체는 서울, 대구, 경기, 강원, 전남, 경북, 강원 평창 등이다.
부산시는 87억원을 들여 시장 관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부산시장 관사는 광안리해수욕장 근처로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는 명당 자리에 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쓰이며 ‘지방 청와대’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지하철역과도 가까워 부산시는 이곳을 국제 행사장이나 기업·대학의 업무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경남도는 작년 9월 창원에 있는 도지사 관사를 도심 속 쉼터로 개방했다.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주말에는 버스킹 공연도 연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아파트 단지와 ‘창원가로수길’ 사이에 있어 동네 주민과 어린이집 아이들이 자주 찾는다. 경남도 관계자는 “개방 1년 만에 방문객이 10만명을 넘었다”고 했다.
인천시는 지난 5월 시장 관사를 ‘시민 서재’로 개방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지은 옛 관사를 시민 도서관으로 되살린 것이다. 인천시는 이 관사를 1977년 매각했다가 2020년 다시 사들여 리모델링했다. 관사로 쓸 당시 일본식 다다미 방의 모습을 재현해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인천시는 앞서 2021년에도 또 다른 시장 관사를 한옥 갤러리로 리모델링했다.
관사를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아파트로 복합 개발한 사례도 있다. 울산시는 지난해 관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15층짜리 아파트를 지었다. 1층은 어린이집과 도서관, 2~3층은 공영주차장, 4~15층은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주택 100가구를 만들었다.
충북 청주시는 2014년 옛 관사 일대 2589㎡ 부지에 82억원을 들여 ‘김수현드라마아트홀’을 지었다. 청주 출신인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의 이름을 땄다. 김씨가 쓴 대본과 저서를 전시하고 드라마 영상도 상영한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곳에는 매년 관광객 1만명이 다녀간다.
관사는 1970~1980년대 중앙정부에서 지자체장을 임명해 내려보내던 ‘관선(官選)’ 시절, 지방에 가는 시장·도지사 등에게 제공하던 숙소다. 보통 높은 담장에 정원 딸린 주택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른바 ‘관사 정치’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95년 이후 지자체장을 선거로 뽑으면서 관사의 필요성은 크게 줄었고, 정부 차원에서도 관사의 운영비와 면적을 지자체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하는 등 관사 개방을 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