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학자가 칠판에 ‘지우지 마시오(Do Not Erase)’라는 팻말을 올려 놓았다. /단추

칠판은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아날로그 학습 도구다. 초창기에 학생들은 작은 개별 슬레이트 칠판으로 공부했다. 대형 칠판은 1801년 교실에 처음 설치됐다고 알려져 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됐지만 수학자들은 일할 때 여전히 칠판과 분필을 사용한다.

“수학 공식과 기호로 가득 찬 칠판을 볼 때마다 위대한 추상화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패턴과 대칭, 구조 같은 추상적 아름다움에 끌리면서도 그 의미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철저한 단절감을 느꼈지요. 거기서 오는 긴장이 좋았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수학자들은 여전히 칠판을 사용한다. 미국 사진작가 제시카 윈은 필즈상 수상자 등 세계 유명 수학자 100여 명을 방문하며 그 칠판을 촬영해 사진집 '지우지 마시오'를 펴냈다. /단추

사진작가 제시카 윈은 수학자들의 칠판에 매료됐다. 지난달 번역 출간된 ‘지우지 마시오’는 미국 뉴욕 패션기술대학(FIT) 사진학 교수인 그녀가 세계 유명 수학자 100여 명을 방문해 촬영한 칠판 사진들과 그들의 목소리로 속을 채웠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하버드, MIT, UCLA, 시카고대, 프랑스 파리의 앙리 푸앵카레 연구소…. 수학 연구의 최전선에 걸려 있는 칠판들이다.

사진작가는 카메라로 세상을 이해하고 탐구한다. 제시카 윈 교수에게 칠판은 어떤 피사체였을까. 이메일로 만난 그녀는 “수학자의 칠판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다. 사진을 찍을 때는 마치 공연을 기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사진만이 그 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유일한 증거”라고 했다.

동역학을 연구하는 미국 시카고대 수학과 에이미 윌킨슨 교수의 칠판. /단추

수학자들은 왜 칠판을 사용하나

제시카 윈은 어릴 적 어느 기숙학교 관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미술을, 아버지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주말에도 교실에서 놀았으니 학교는 집이자 놀이터였다. 긴 세월이 흘러 분필 가루 자욱한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수학자들의 칠판을 사진에 담게 될 줄을 몰랐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여름마다 대학과 뉴욕시를 떠나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 끝자락에 있는 해변 마을에서 지내곤 했어요. 그곳의 이웃인 에이미 윌킨슨과 벤슨 파브 부부는 시카고대에서 강의하는 이론수학자였습니다. ‘수학을 위한 수학’을 하는 그들이 저를 그 세계로 안내했죠.”

-칠판에 흥미를 갖게 된 순간이라면.

“교육과 학습을 위한 오래된 도구잖아요. 그 칠판 위에서 부부가 복잡한 생각을 실행하는 방식에 매료됐습니다. 수학 커뮤니티에서 여전히 칠판을 사용한다는 점에 놀랐고요.”

-만나본 수학자들의 공통점이 있었나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이죠. 수학자는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수학자의 칠판이 내뿜는 아름다움과 신비함,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창조하는 것 같았어요. 며칠 전 동료 수학자와 나눈 생각, 지난주에 일한 흔적도 남아 있었지요. 생각의 퇴적층처럼 보였습니다.”

수학자들의 칠판을 촬영해 '지우지 마시오'를 펴낸 사진작가 제시카 윈. "칠판은 수학자들의 집이자 실험실이에요. 수학이라는 추상 세계가 칠판 위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됩니다." /단추

-가장 흥미로운 칠판은 누구의 것이었나요.

“각각의 칠판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아해요. 어떤 의미에서 칠판은 수학자들의 초상화와 같아서 어느 하나를 고를 수가 없어요. 음악가가 자기 악기와 사랑에 빠지듯 수학자는 자기 칠판을 사랑합니다.”

-제목은 왜 ‘지우지 마시오’라고 정했나요.

“수학자들은 자신의 작업이 지워지지 않도록 칠판에 ‘지우지 마시오(Don’t Erase)’라는 팻말을 세워둬요. 거기서 제목을 가져왔습니다. 사진으로 촬영한 칠판은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됐지요.”

-수학자의 칠판을 사진작가의 빈 프레임과 비교한다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빈 칠판에 처음 분필을 그으며 자신의 생각이 흘러갈지 알고 있는 수학자는 별로 없어요. 기술이 발전했는데 그들이 지금도 칠판을 쓰는 이유를 아시나요? 공간을 물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동하는 행위가 창의적 사고와 탐구에 더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발견이 이뤄져요. 우리 두뇌는 디지털 기술의 빠른 속도보다 칠판의 아날로그에 더 잘 부합하는 것 같아요.”

창조와 발견의 작업에서는 ‘더 빠르게’가 반드시 ‘더 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칠판 위에서 진행되는 판서 작업은 다분히 신체적이고 시간에 의존한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서사가 실시간으로 전개되다 보니 생각이 천천히 흐르고 정보가 좀 더 쉽게 전달된다. “분필을 손에 쥐고 칠판에 긋는 촉각적 경험은 사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요. 어두운 뇌에 환하게 빛이 들면서 어느 순간 생각이 폭발하고 분출합니다.”

앙리 푸앵카레상과 훔볼트 연구상을 받은 라이스 대학교 수학자 데이비드 다마니크 교수의 칠판. /단추
제시카 윈이 펴낸 사진집 '지우지 마시오'

칠판 주인들의 이야기

필즈상(Fields Medal) 수상자 테렌스 타오 UCLA 교수 등 수학자들은 그녀를 반겨주었다. 기꺼이 자신의 ‘보물’을 공유하고 싶어 했다. 윈 교수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를 방문하고 이렇게 썼다. “이 기관에서 연구자의 유일한 임무는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생각하는 것이다. 바깥세계로부터 보호돼 자기 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받은 인상이라면.

“연구와 협업에 방해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놀라운 안식처였어요. 그곳의 물질세계가 수학자들에게 정신적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책에 칠판 주인들의 이야기도 곁들였는데.

“테렌스 타오 교수는 수학을 ‘운무에 둘러싸인 풍경’에 비유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안개가 흩어지면서 서로 떨어진 봉우리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발견의 과정이 칠판 위에서 펼쳐져요.”

-수학자에게 칠판과 종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칠판에는 크기가 주는 물성이 있어요. 벽에 걸린 대형 칠판에서 작업 중인 채로 몇 날 며칠을 보낼 수도 있고 여럿이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도 있습니다. 종이로는 그렇게 하기 어렵죠. 쉽게 지울 수 있는 아이디어를 놀이하듯 탐색하는 것도 칠판이 더 쉽습니다.”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 연구실에서 만난 허준이 교수. 칠판에는 분필로 적은 수식과 기호, 도형이 춤을 추고 있다. “스마트 기기는 단기적으로는 자극과 지식을 주는 것 같지만 그만큼 우리의 포텐셜을 깎아먹어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한쪽 벽 전체가 칠판이었다. 분필로 적은 수식과 기호, 도형이 칠판에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종이에 적으면 그 지식을 영원히 소유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칠판은 다르다”며 “뭘 쓰더라도 이해하고 소화한 만큼만 내 것이고 지우는 순간 안녕이다. 지식의 휘발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칠판이 종이보다 매력적”이라고 했다.

-당신이 만난 수학자들 대부분은 전설의 ‘하고로모’ 분필을 썼나요?

“네, ‘하고로모 풀터치’ 분필은 수학자들이 탐내는 제품입니다. 대량 구매해 쟁여둘 정도로요. 하고로모 분필이 현대 수학의 화석 연료인 셈이죠(하고로모는 1932년에 설립된 일본 기업이지만 2015년 한국 기업이 인수하며 현재는 ‘메이드 인 코리아’가 됐다).”

80년 역사의 일본 분필 회사를 인수해 한국 기업 '세종몰'이 생산해 수출하고 있는 하고로모 분필. 수학자들은 '분필계의 롤스로이스'로 칭송한다. /세종몰

-수학자의 칠판을 크게 인화해 거실 벽에 걸어둔다면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질까요?

“아뇨, 저는 이 사진들이 고등 수학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생각해요. 거실 벽에 걸면 일상에서 놀라운 자극이 될 것입니다.”

-수학자는 마침내 문제를 풀어내더라도 그 논증을 정리하고 군더더기 없이 증명해 보일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제 이웃인 수학자 벤슨 파브는 ‘수학의 진리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진리였으며,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돌파구는 드물게, 그리고 대개는 수없이 실패를 거듭한 후에야 찾아옵니다. 논증하려면 또 한참이 걸리죠. 그건 수년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건물을 선보이기 전에 비계(scaffolding)를 치우는 것과 같아요. 우아하고 간결해야 합니다.”

-수학자들의 칠판을 촬영하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수학의 매력이 있다면.

“추상적 사고가 소용돌이치는 선으로 폭발하는 장면을 볼 땐 금방 최면에 걸릴 것 같았어요. 수학자가 하는 일은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존되고 명예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즐기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본 기분이에요. 이제 이 책으로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를 초대해 자신의 일을 기록하게 하고, 분필 가루 자욱한 먼지투성이 방 안에 감춰진 발견과 진리, 아름다움을 들고 나오게 허락한 수학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