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일제강점기 강제징병 무사 귀환 염원 조끼와 어깨띠'의 조끼 앞뒤 모습과 어깨띠. /문화재청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그의 지킬 본분을 지켜온다 하였지마는 오늘처럼 뜨거운 가슴을 정성 드린 ‘센닌바리’를 누비어 본 적이 없었으리라.”(매일신보 1944년 1월 20일자에 실린 친일 기고문)

‘센닌바리(천인침·千人針)’란 러일전쟁 이후 20세기 전반 일본에서 유행한 풍습이다. 한 조각의 천에 1000명의 여성이 붉은 실로 한 땀씩 박아 천 개의 매듭을 만들어 출정 군인에게 주는 것으로 ‘이걸 지니면 탄환에 맞지 않는다’는 부적 역할을 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때 ‘후방’이었던 조선에서도 관변단체와 여학생을 동원해 센닌바리를 만들어 전방 군인들에게 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런데 이 ‘센닌바리’ 방식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문화재 등록을 앞두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17일 ‘1950년대 낙하산 블라우스’ ‘1960년대 신생활복’과 함께 ‘일제강점기 강제징병 무사귀환 염원 조끼와 어깨띠’<사진>의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일제 말 징집된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어머니가 만든 것으로, 조끼 뒷면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넣었다. 글자 그대로 1000명이 한 땀씩 만든 것은 아니지만 ‘센닌바리’의 형식과 정신을 따랐다는 것이 문화재청 설명이다.

애끊는 모정(母情)을 짐작 못 할 바 아니지만, 이 유물을 굳이 문화재로 등록해야 하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문화재청은 유물의 가치에 대해 “국권 침탈이 우리 문화의 깊숙한 부분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사례고,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 아닌 자기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앞으로는 ‘국권 침탈이 우리에게 깊이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친일 인사 관련 자료나 일본군의 군사 시설 등도 문화재로 등록·지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 존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됐던 조선총독부·경성부청 건물은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대한민국 중앙청과 서울시청으로도 사용됐기 때문에 이와는 다른 경우다.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의 정의는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임을 생각해볼 때,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는 개운치 않은 등록 예고 결정을 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