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선 중세 이후 왕이 주재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귀족에게 까다로운 드레스 코드를 요구했다. 드레스 코드 포고령까지 발표할 만큼 엄격했는데 그중엔 지난 모임과 같은 옷을 또 입고 오면 안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복인 연미복만 해도 시간에 따라 명칭부터 달랐다. 아침에 입는 것은 모닝 코트, 오후 6시 이후 입는 것은 흰색 나비 넥타이를 매야 하기 때문에 화이트 타이라 했다. 앞섶은 반드시 풀을 먹이고 구두는 광택 나는 에나멜화여야 한다는 등 장소와 격에 따라 규정이 다 달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 시절 청와대 외교 행사에 초대받았는데 가보니 혼자만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비즈니스 정장이 그날의 드레스 코드였는데 비서진이 실수로 연미복 차림이라고 전했던 것이다. 김 전 대표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승한 수행비서에게 “한강에 뛰어내리레이”라고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영국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모든 선수에게 머리띠부터 운동복 신발까지 흰색만 입게 한다. 관중석도 로열석은 정장을 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 일본 참의원은 모자와 코트·목도리 차림으로 본회의장에 참석할 수 없다. 프로 레슬러 출신으로 참의원을 지낸 이노키는 늘 스카프를 둘렀지만 참의원 본회의장에선 스카프를 벗었다. 칸 영화제가 열리는 뤼미에르 극장엔 턱시도와 드레스만 허용된다. 지난 2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드 티와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 배우 애덤 샌들러는 진행자로부터 “권위 있는 밤인 만큼 제대로 된 옷을 입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샌들러는 응원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드레스 코드에 대한 반발도 만만찮은 모양이다.
▶지난주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백악관 정상회담 드레스 코드가 논란을 빚고 있다. 젤렌스키가 늘 입는 군복 스타일에 대해 현장에 있던 미국 기자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레벨의 사무실에서 정장을 거부하는가”라고 따지듯 묻자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회담 배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지켜본 우크라이나인들은 분노했다. ‘우리도 정장이 있다’는 제목의 게시물 여러 개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는데, 그 중에는 전장에서 다리를 잃은 남녀가 의족 위에 한껏 화려한 옷을 입은 비장한 장면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심정을 표현한 드레스 코드로 보였다. 미국 교수의 저서 ‘드레스 코드’에 “드레스 코드는 ‘당신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장치로도 쓰인다”는 구절이 있다. 미국이 어쩌다 약소국 지도자의 옷차림까지 트집 잡는지, 참으로 낯선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