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목숨이 다했누. 비 온 뒤끝도 아닌지라, 길바닥에 널브러진 지렁이가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몇 걸음 못 가 한 마리 또 한 마리…. 덩치가 열 배도 넘건만, 반쯤 말라 개미한테 끌려가는 놈도 있다. 기왕 죽은 몸 실컷 공양(供養)하라지. 물도 차지 않은 집을 왜 나와 참변 당하는고. 혹시 뜨거운 햇볕이 땅속까지 달궈 못살게 군 탓이더냐.
‘비는 오래 안 내리고 볕만 쨍쨍한’ 바로 요즘 더위가 ‘강더위’다. 이때 ‘강’은 ‘물기 없는/마른’ 상태를 나타내는 접두사. 국물 자작하게 끓인 ‘강된장’, 마른기침 뜻하는 ‘강기침’, 눈물 없이 우는 ‘강울음’ 할 때와 같다. ‘강추위’도 본래 ‘눈, 바람 없이 매서운 추위’를 가리켰다. 이젠 습도와 관계없이 심한 추위를 ‘강(强)추위’라고들 하는 바람에 쓰임새를 잃고 있다.
강더위만 있다면 그나마 낫지. ‘오늘도 35도 안팎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겠습니다. 무더위가 오래가면서 온열 질환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말 그대로 습도(濕度)마저 높을 때 ‘찜통더위’라 한다. 달리 쓰는 말이 바로 ‘무더위’. ‘물(水)’이 변해 ‘무’(‘무소’ ‘무자맥질’의 ‘무’와 같다)가 됐다는 표준국어대사전 설명대로, 눅눅하게 찌는 듯한 더위다.
습도를 따지지 않는다면 ‘불(볕)더위’ ‘된더위’ ‘한더위’ 따위가 어울린다. ‘된더위’는 형용사 ‘되다’의 관형형 ‘된’이 가리키는 대로 ‘심한 더위’라는 뜻. ‘된맛’ ‘된바람’ ‘된서리’ 같은 말에서도 나타난다. ‘한더위’ 역시 ‘한여름’ ‘한밤중’처럼 ‘한창/바로’의 뜻을 지닌 접두사 ‘한’에서 보듯 된더위와 비슷하다.
되짚어가는 길에서 꾸물거리는 지렁이를 보았다. 오지랖도 넓지, 한번 살려보자. 나뭇잎이며 잔가지며 집어다 간신히 길섶에 데려다주긴 했으나…. 이 염천(炎天)에 과연 살아 있을까. 알량한 걱정도 잠시, 혹서(酷暑) 식힐 비 뿌리길 빌고 있다. 살겠노라 또 위험한 땅 위로 나와야 하는 곤경을 치를 텐데. /글지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