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나온)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을 입는 나라는 귀국과 우리나라, 오키나와, 베트남뿐입니다. 서양과 남만에서 우리 나가사키에 배를 보내는 나라가 120여개 국입니다. 이 나라들에는 각각 그 나라의 도(道)가 있어 다스려집니다. 이용후생의 도를 세우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니, 하필 중국만 유독 귀하고 오랑캐의 가르침은 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1763년, 일본 아카마가세키(赤間關·지금의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는 조선통신사 사행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에는 유교 말고도 수많은 다스림이 존재하고 있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학문이라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간 주장이었다. 하지만 원중거(元重擧)와 성대중(成大中) 등 조선통신사들은 일본 학계가 행여 주자학을 버리고 이단으로 빠지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조선통신사가, 18세기 일본 사상계에 불어닥친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흐름을 파악하는 데 뒤처져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문학 전공자인 구지현(具智賢) 박사(연세대 BK21 박사후연구원)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지’(연세대 국학연구원 刊) 제138집에 기고한 논문 ‘필담을 통한 한일 문사 교류의 전개 양상’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구 박사는 조선통신사들이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아카마가세키에서 통신사와 일본 문사들이 나눴던 필담 기록 80여 종을 수집·분석했다. 18세기 초 일본 유학의 흐름은 전통적인 주자학 연구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徠·1666~1728)를 중심으로 한 고문사학(古文辭學)으로 바뀐다. 고전 글자의 원래 뜻에 가깝도록 유학을 재해석, 주자학적인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학풍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실학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는 18세기의 조선통신사들은 번번이 이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1748년의 무진사행(戊辰使行) 당시 아카마가세키의 학풍은 주자학에서 소라이학(�徠學)으로 완전히 바뀐 상태였지만, 제술관 박경행(朴敬行)을 비롯한 조선통신사들은 여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763년의 계미사행(癸未使行)에 이르러서야 조선통신사들은 비로소 ‘도대체 소라이학이 뭔가’를 탐색하지만 이미 소라이학은 쇠퇴기에 접어든 뒤였다. 일본 학계는 이제 서양 학문인 난학(蘭學)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개방적인 학풍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통신사들은 여전히 ‘정학(正學)’과 ‘이단’을 나누는 시각에 머물렀다.

조선통신사들이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일본 학계를 무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일본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문제는 유연하게 변화해 가는 일본의 변화를 제대로 분석하기엔 이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경직돼 있었고, 중화적 질서와 주자학적 사상 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아카마가세키의 일본 학자 야마가타 슈난(山縣周南)이 1711년에 “퇴계의 문집을 이미 읽어봤다”고 말한 반면, 조선통신사는 1748년에 가서야 비로소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의 문집을 구해 볼 수 있었다.

구 박사는 “조선은 일본을 파악하는 데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일본은 부산의 왜관과 대마도를 통해 늘 조선의 문물을 수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조선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일본을 너무나 몰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