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천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서재필(徐載弼·1864~1951) 선생.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 외가였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성주 이씨 집안이다. 선생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서광언(徐光彦)은 동복(화순군 동복면 일원)현감이었다. 어머니는 이때 줄곧 가내마을 외가에서 지냈다.
가내마을에 터를 잡은 지 2대째인 이기대(李箕大·1792~1858)가 외조부. 재산을 일으킨 외조부는 집안에 서재(書齋)를 마련하고 서적 수 천 권을 비치하고 있었다. 면암 최익현은 "책을 모으는 벽(癖)이 있어, 수백 수천권이 쌓였다"고 했다. 한말 호남사림의 지주인 노사 기정진은 "서재를 짓고 식량을 두어, 와서 읽는 사람에게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부근의 인사들이 많이 성취했다. 흉년이 들면 살려낸 사람의 수가 심히 많았다"고 했다. 서재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렇듯 노사, 추사, 면암과 교유가 깊었다. 다섯째 사위가 바로 서광언.
선생의 큰 외숙이 이지용(李志容·1825~1891). 동복에 살았던 실학자이자 발명가였던 하백원이 어릴 적 지용의 시(詩)를 보고 찬탄했다고 한다. 과거를 거쳐 현감을 지냈다. 1876년 흉년이 들자 "선친의 유지"라며 24개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고 했다.
이지용의 장남은 교문(敎文·1846~1914). 노사에게 배웠고, 노사의 손자 기우만과 벗하고 지냈다. 기우만은 단발령 이후부터 의병을 주도했던 인물. 교문은 1894년 시국 타개책을 상소하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과 함께 충청도에서 거병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화순 쌍봉사를 근거지로 호남의병창의소를 세워 활동했다. 끝내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을 기리며 "河海(하해)가 마른다 해도 그 節義(절의)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했다. 보성출신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도왔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의 장남 일(鎰·1868~1927)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미국에 있던 서재필과 주고 받았던 서신은 한국전쟁때 집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일의 장남이 용순(龍淳). 용순도 항일운동을 했다. 그의 3형제 모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47년 서재필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외장손 용순을 만났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나로 인하여 외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고향에 돌아가 가세를 유지하길 바란다"고 했다. 경성법전을 졸업한 용순은 낙향, 학숙을 열며 고향을 일구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서재필 선생의 충남 논산 집안은 멸문(滅門)되었다. 가족들은 참수되거나 자살했고, 천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부인은 두 살 난 아들을 업고 친정에 찾아갔다가 대밭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1994년 서재필 선생의 유해가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됐을 때 외가 인사들이 모신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 때 영정을 들었던 이가 외가쪽 이상호(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씨였다.
선생이 태어난 외가에서 3㎞ 떨어진 주암호변에 서재필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내달 8일 공식적인 개관 기념식이 열린다. 그 기념관 건립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이가 김중채씨이다. 하승완(변호사·전 보성군수) 조선대 교수는 기념관과 생가를 잇는 도로를 새로 닦고 주차장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땅(5000평)을 사서 기증하기도 했다. 이들 역시 보성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