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후 지난 1년간 적지 않은 규제 전봇대를 뽑아주었다.
엊그제도 중소기업들의 대출 보증을 파격적으로 확대해주는 결단을 내렸고, 해외 순방 길에서 측근이 타는 차를 비운 후 그 자리에 회장님, 사장님을 대신 모신 적도 있다. '제발 투자 좀…'하며 범법자 총수들에게 사면장을 두루 배달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전혀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워낙 앞이 안 보이는 시절이라곤 해도 특히 대기업 총수들과의 거래에서는 대통령이 손해 보는 장사에 머물고 있다.
대사면에 감격하는 척하며 일자리 창출 계획을 홍보하던 재벌들도 위기 발발 후에는 잠잠해졌다. 전봇대와 대못을 뽑아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감사 편지는커녕, 도리어 집단 명퇴와 비정규직 해고로 응답하고 있다.
대기업이 많은 울산, 인천 같은 대도시일수록 하도급업체들이 더 무너지고, 실업자는 더 많이 쏟아진다. 이 정권 들어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대기업들이 침몰하려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하는 모습이다.
친(親)재벌, 대기업 편애라는 욕을 들을 대로 다 들어가며 기업을 옹호해온 입장에서 보면 배신감을 느낄 만한 불평등 거래가 지속되고 있다.
올 들어 최대 화두가 된 일자리 지키기에도 재벌 총수나 대기업 경영인들이 온몸을 던지는 자세는 아니다.
그중에는 경영진이 임금 삭감에 앞장선 곳이 있고, 감원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 약속한 그룹도 있다. 몇몇은 대졸 초임 사원의 월급을 깎아 인턴사원을 채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무슨 삼류 가면극을 보는 기분이다. 정부 보조금이 따르는 인턴 채용 계획을 부풀려 청와대에 보고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본사 사원을 하도급 회사로 내보내며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안 한다'고 홍보하는 사례가 있다.
경영자 모임인 경총은 며칠 전 '임금과 고용을 교환하는 방식'의 일자리 원칙을 선언했다.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연봉을 자진 삭감하라는 서슬 퍼런 압력이 월급쟁이들에게 갈수록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있다.
당장 경영난을 겪고 있다면 응당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가 옳다. 그러나 경영인들이 자기 주머니를 먼저 털어내며 사원 일자리 지키기에 온 힘을 쏟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사내 유보금을 보라. 550여 상장 회사들은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무려 393조원이 넘는 유보금을 갖고 있다. 비상금으로 쓰려고 적립해 놓은 돈이다.
오너나 경영인들은 이 유보금이 새 공장을 짓고 신기술-신상품 개발에 투자할 돈이라고 말한다. 조직의 미래를 위해 남겨둔 것이므로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펄쩍 뛸 것이다. 유보금을 종업원 고용 유지에 사용하는 데도 결사반대한다.
월급쟁이 입장에서는 좀체 납득되지 않는 논리다. 회사의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 남겨둔 돈이라고 해서 피고용인의 암울한 장래를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회사의 앞날만 중요할 뿐, 유보금을 쌓는 데 함께 고생한 사원들의 형편은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유보금 적립에 사원들이 공헌했다고 인정한다면 주주나 경영자가 사원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돈을 몽땅 털어 써버리면 재투자가 위축돼 회사 성장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주가도 하락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회사가 망해 지키려던 일자리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 유보금의 대부분은 회사 발전을 위해 남겨두되, 그중 10%나 20%만이라도 고용 유지나 일자리 만들기에 써보자는 것이다.
회사마다 형편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일부는 '당장 부도 막을 현금도 없다'고 아우성치고, '비상금을 깨 먹자고? 배부른 소리 작작하라'고 욕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수천억원, 수조원씩 이윤을 남겼다고 뽐내던 대기업일수록 경영 합리화를 앞세워 발 빠른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풍경은 이상하지 않은가. 10대 그룹은 자본금의 8배가 넘는 넉넉한 유보금을 갖고 있다.
회사 형편이 닿는 대로 사내 유보금 중 일부를 꺼내 고용 유지와 하도급 회사 지원에 활용하는 방안이 마련되면 적어도 수만명의 실업자를 쉽게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