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아빠 야구 못하잖아." 야구천재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이 친구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싸웠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부인 정정민씨도 눈물이 났다. 바람의 아들, 야구천재 이종범. 그에게 가족은 큰 힘이다. 성원을 아끼지 않는 팬들과 함께 야구를 하는 이유다. 올해 야구천재는 다시 일어났다. 제2의 전성기다. "두산 김현수를 보면서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생각을 가끔 해요. 얘들한테 아빠가 예전에 잘했다고 말은 하는데…. 아들놈은 아는 것 같은데 딸애는 야구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하긴 그만큼 야구를 잘했던 선수가 있을까.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있는 야구천재를 광주구장에서 만나봤다. |
'너네 아빠 야구 못하잖아…' 아들 싸웠단 얘기에 울컥 |
나도 한때 잘나갔었는데 ^ ^ |
(인터뷰전 덕아웃에서 만난 이종범은 피곤해 보였다. 지난주초 목동 히어로즈전에서 비를 맞고 경기를 해서인지 피곤이 쌓였다고 했다. 뭔가 즐거운 화제가 필요했다)
ㅡ아직도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선수에요. 잘하니까 난리가 나네요.
▶그런가요. 팬들이 응원을 많이 해줘요. 은퇴하는 날까지 팬들에게 좋은 플레이를 보여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ㅡ옛날 이야기 좀 해볼까요. 93년 데뷔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당시 해태에는 워낙 잘하는 선배들이 즐비했어요. 일단 살아남아야 했죠. 일찍 나가서 청소도 하고 인간성도 보여주고 실력도 보여주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러니까 선배들이 인정을 해주더라구요.
ㅡ해태 시절 구타도 많았던 걸로 아는데.
▶많이 맞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잠시 고민한다) 이런 이야기해도 될까 모르겠는데 어느날 한 선배가 경기 끝난 뒤 미팅을 하면서 부르더라구요. 93년 빙그레 경기였는데 그날 많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홍현우와 캐치볼을 하다가 둘이 웃는 걸 보고 화가 나신 거죠. 뺨을 맞았는데, 그 때 우리 잘못으로 모두 다 맞았죠. 4,5대를 세게 맞고는 입안이 터졌죠.(웃음) 아마 그때 그렇게 강하게 커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ㅡ그 시절엔 다들 술도 많이 먹었죠.
▶신인 때 원정을 가면 선배들이 술 먹으러 나가고 저는 호텔방을 지키면서 메모지에 여기저기서 전화온 것을 받아 적어야 했죠. 그러다 선배들이 불러서 나가면 주위 분들하고 인사만 하고 "너는 내일 경기해야 되니까 들어가라"고 해서 그냥 들어오곤 했죠. 연차가 쌓이고 난 뒤 언제인가 삼성과 더블헤더를 했는데 전날 비가 무척 왔어요. 당연히 안하겠지하고 새벽 5시까지 술을 먹었는데 아침에 어머님이 해떴다고 깨우더라구요. 그 때 1차전과 2차전 첫타석에서 홈런을 쳤어요.
ㅡ98년 일본 주니치에 입단했잖아요.
▶평소 메이저리그 진출이 꿈이었죠. 그런데 구단에서 일본에 가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계약할 때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되지 않았어요. 구단이 다 도장을 찍었죠.(당시 이적료 4억5000만원, 계약금 5000만원, 연봉 8000만원이었다)
ㅡ결국 부상으로 실패했죠.
▶진출 첫 해에 가와지리의 공에 맞아 팔꿈치가 부러졌잖아요. 그리고 이듬해에는 주니치에 후쿠도메가 들어오면서 수비위치도 유격수에서 외야로 옮겼고. 호시노 감독과의 불화 등의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 그 팀에서 나를 제대로 인정을 하지도 않았고 기회에 있어서도 불평등 했어요.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 당시 원형탈모증까지 생겼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니치에 웨이버공시 요청을 했고 받아들여져서 한국으로 들어왔죠.
ㅡ최근 2년 동안 구단에서 은퇴를 종용했지요.
▶지난해에는 코치와 유학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돈도 필요없다, 선수생활 1년만 더하겠다, 안되면 내가 은퇴하겠다며 선수생활을 고집했죠. 정 안되면 돈을 안받아도 괜찮으니까 선수생활을 더 할 수 있는 다른 팀에서라도 뛸 생각을 했어요.
ㅡ아들도 야구를 하죠.(아들 정후군이 광주 서석초등학교 야구선수다)
▶네. 힘들어서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워낙 치고 달리는 걸 좋아하더라구요. 포지션은 유격수에 1번타자를 쳐요.(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웃으며 흐뭇해한다)
ㅡ야구를 안했으면 무엇을 했을까요.
▶축구를 했을 거예요. 워낙 어릴 때부터 축구를 잘했어요. 외삼촌께서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셨는데 서림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있다가 없어지는 바람에 야구부에 들어갔어요. 중학교 진학할 때도 북성중학교에서 축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죠.
ㅡ야구의 매력은 뭐죠.
▶(한참 생각한다) 매력이라기보다 저는 유니폼만 입어도 행복해요. 한창 때는 경기전 생각하는 게 실제 다 이루어졌죠. 96년 빙그레와의 경기였나, 1-4로 지고 있는데 주자가 만루상황이 되고 포수 타석에 대타가 나와서 죽었어요. 그 상황을 보면서 내가 만루홈런을 치고 포수를 보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정말로 만루홈런을 치고는 포수마스크를 썼죠.(웃음)
ㅡ시간이 많이 됐네요. 마지막으로 후배나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요즘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야구는 한 때가 있다, 길어야 10년이다, 모든 걸 차지할 수 있는 곳이 그라운드다, 그라운드에서 간절해지라고 말이죠. 제가 올해 40인데(70년생), 요즘 사회에서 40이면 명퇴도 많고 하잖아요. 그 분들에게 이 나이에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최근 2,3년간 아내가 많이 고생했어요. 지금은 잔소리가 많아졌는데 이제 코치가 다됐어요.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조범현 감독이 이종범을 찾았다. "오늘 뛸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종범은 "당연히 뛰어야죠"라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얼굴색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에 표정은 누구보다 밝아보였다.
이종범은 왜 '야구천재'라 불렸을까. 성적표가 말한다. 93년 데뷔 첫해, 타율 2할8푼을 기록했다. 16홈런-53타점의 장타력도 과시했다. 특히 73도루를 기록, 톱타자로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해 한국시리즈 MVP도 차지했다. 이듬해인 94년, 그는 야구판을 평정한다. 타율 3할9푼3리, 19홈런, 77타점, 118득점. 여기에 도루는 무려 84개를 기록했다. 환상적인 유격수 수비는 야구천재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이후 98년 일본 주니치에 진출하기 전까지 매년 타율 3할2푼-30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97년에는 30홈런-64도루로 '30-30'클럽에도 가입한다. 한창때 그가 1루에 나가면 2, 3루까지는 거저 먹는다는 소리가 있었다. 94년 84도루는 역대 한시즌 최다기록이다. 한경기 6도루(93년 9월26일 전주 쌍방울전)의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종범은 "도루는 체력이 우선돼야 한다. 그리고 뛰면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며 노하우를 공개한다. 일본 진출후 부상과 부진으로 2001년 KIA로 복귀한 뒤 그해 45경기서 타율 3할4푼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3할1푼5리에 50도루로 도루왕도 차지했다. 하지만 2005년 타율 3할1푼2리를 기록한 이후 하락세가 뚜렷이 나타났다. 올해는 15일 현재 타율 2할8푼4리, 1홈런, 18타점, 7도루로 베테랑의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