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92호인‘물가풍경 무늬 정병’(고려12세기·높이 37.5㎝). 청동 바탕에 은을 박아 한가로운 물가 풍경을 묘사했다.

부처나 보살에게 바치는 맑은 물을 담는 물병이 정병(淨甁)이다. 관음보살이 늘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이며,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는 달빛 비치는 바다 바위에 앉은 관음보살 옆에 언제나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다. 일반 물병과 달리 물을 담는 주구(注口)와 물을 따르는 첨대(尖臺)가 따로 있는 독특한 형태가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 미술관 백자실에서 23일 시작한 테마전 《정병과 관음신앙》은 불교 의식구이자 일상 생활용품인 정병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 정병 10여 점을 엄선해 한자리에 모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물가풍경 무늬 정병(국보 92호)'이다. 높이 37.5㎝의 자연스럽게 녹이 슨 청동 정병이 은은한 녹색으로 빛난다. 0.5㎜ 굵기의 은사로 포류수금문(蒲柳水禽紋·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물가에서 헤엄치는 새들과 배를 탄 사람 등을 묘사한 서정적 문양)을 새긴 전형적인 고려시대 정병이다. 버드나무와 갈대, 오리와 기러기가 마치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선명하며, 첨대와 목·몸체의 비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병과 함께 전시되는 '금제 관음보살상'은 2.6㎝ 크기의 자그마한 고려시대 보살상이다. 관음보살이 오른쪽 무릎을 세운 윤왕좌(輪王坐)의 자세로 앉아 있으며 관음보살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이 있다.

원래 정병은 인도에서 승려가 마실 물을 담던 수행도구였다. 5세기 초 관음보살이 버드나무 가지와 맑은 물을 중생에게 받은 뒤 그들의 병을 치료해줬다는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불교의 의식구로 의미와 기능이 확대됐다. 이후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보살상도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정병은 주로 고려시대에 제작됐다. 《고려도경》에는 귀족과 관리, 사찰과 민가에서 물을 담을 때 모두 정병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인도에서 승려의 생활용기였던 정병이 고려에서는 모든 계층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병이 된 것이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02)2077-9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