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운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인이 전동휠체어 위에 반쯤 뉘어져 있었다. 백발 무성한 머리는 심하게 기울어져 왼쪽 어깨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다. 스스로 가눌 수 없는 고개가 뒤로 젖혀져 버리면 누군가 바로잡아 줄 때까지 숨줄만 꼴딱거렸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장애인보호시설 '한벗둥지'에서 만난 서정슬(63) 시인은 도저히 시를 쓸 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장애를 나타내는 '선천성 뇌병변장애' '뇌성마비 1급' 같은 단어들이 추상적으로만 들렸는데, 그를 마주하고 보니 무슨 뜻인지 금세 와 닿았다. 50년 가까이 시를 썼고, 시집 6권을 펴낸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였다.
무연히 마주 선 시인과 기자의 말문을 틔워준 것은 한벗둥지를 꾸려가는 한벗재단의 백진앙(63) 이사장이었다. "바로 이겁니다"라면서 백 이사장이 건넨 A4 규격의 종이엔 '아빠와 아기'란 제목의 동시가 적혀 있었다. '아빠와 아기가 서로 마주 봅니다/ "나도 이렇게 작은 아기였었지"/ "나도 이렇게 키 큰 아빠 될 거야"/ 아빠와 아기가 서로 생각합니다.'
바로 다음 달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역 역사(驛舍)에 내걸릴 그의 작품이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시를 써넣는 사업을 하는 서울시가 그의 작품 중 하나를 뽑아 싣기로 한 것이다.
서 시인은 서영갑(88) 전 고려대 교수의 맏딸로 태어났다. 장애가 없었다면 그도 다른 남매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의사나 주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 시인에겐 선천성 뇌성마비가 있었고 혼자 걸을 수조차 없었다. 1950년대 장애인들이 정규교육을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서 시인을 창작의 길로 이끈 것은 오직 자신의 재능이었다. 형제·자매들이 공부할 때면 그는 벽에 기대앉아 뒤에서 책을 들여다봤다. 학교 한 번 가지 않고 '뒷글'로 문리를 깨쳤다. 글을 읽고 쓰게 되자 그의 내면에서 조금씩 시심(詩心)이 싹텄다. 자꾸만 곱아 드는 두 손에 간신히 연필을 끼우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끼적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작품을 본 식구들은 깜짝 놀라 어린이 잡지에 보냈다. 시는 잡지에 실렸다. 당선, 당선…. 그 뒤로도 작품은 자주 뽑혔고 그는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80년 첫 시집 '어느 불행한 탄생의 노래'를 펴냈고, 1982년 '새싹문학상'을 받았다. 당시 수상작 '소녀의 기도'는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개미를 한 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개미는 사람을 무는 놈이었어요/ …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 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
온전한 정신으로 굳은 몸에 갇혀 사는 그의 시는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1997년 또 다른 동시 '장마 뒤'가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렸다. '엄마가 묵은 빨래 내다 말리듯/ 하늘이 구름조각 말리고 있네/ 오랜만에 나온 햇볕 너무 반가워.'
2000년을 넘기며 서 시인의 창작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몸이 점점 더 불편해진 데다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균형을 잡고 엎드리거나 두 손에 연필을 쥘 수도 없었다. 남에게 시를 불러주고 받아적게 하기도 어려웠다. 동시 한 편을 부르는 데 1시간 이상 걸렸고, 복잡한 시어는 아예 발음할 수 없었다. 시 쓰기를 멈춘 채 4~5년이 흘렀다. '시인 서정슬'은 죽어버린 것 같았다.
다시 '빛'이 찾아든 것은 2006년 10월, 지금 머무르고 있는 한벗둥지로 옮기면서였다. 서울시 지원을 받는 한벗둥지에선 장애인을 위해 보조기구를 맞춰주는 시 보조공학 서비스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서 시인의 사연을 들은 센터 직원들은 꼼꼼히 그를 뜯어보고 말했다.
"그래도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자유롭게 움직이시네요!"
그해 말 서 시인은 새로운 연필을 받았다. 모니터 한쪽에 화상 키보드가 뜨는 노트북 컴퓨터와 발가락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막대형 '조이스틱'이었다. 전동휠체어 발판 부분에 놓인 조이스틱을 발가락으로 움직여 화상 키보드에서 원하는 키를 누르면 원하는 글자가 입력됐다. 조이스틱 쓰는 법을 배운 지 한 달 만에 시 6편을 썼다. 몇 년 동안 머릿속에만 고여 있던 시상(詩想)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지난 3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벗둥지를 찾았다. 전동휠체어에 앉은 서 시인은 장애인용 변기가 의자인 줄 알고 걸터앉은 오 시장을 보고 킬킬대며 물었다. "시…장님… 시 좋아…하세요?" 오 시장은 "그럼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도 걸어놓을 건데요"라고 대답했다. 서 시인을 수발드는 사회복지사가 그의 작품을 오 시장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런 작품이 다 있었네!"
몇 달 뒤 서울시로부터 "시를 세 편만 뽑아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서 시인의 작품도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새기겠다는 연락이었다. 한영희 서울시 장애인복지과장은 "마침 '시가 흐르는 도시'를 만드는 중인데 좋은 작품을 만나서 반가웠다"고 말했다. 요즘 서 시인은 하루 6시간쯤 휠체어에 앉아 시를 쓴다. 오전 10시쯤 사회복지사가 전동휠체어에 앉히고 노트북 컴퓨터를 켜주면 오후 5시까지는 꼬박 집중한다. 권지명 한벗둥지 시설장은 "시를 쓰다 막히는 데가 있으면 혼자 음악도 듣고 메일도 보내신다"고 말했다.
서 시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가 뒤틀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권 시설장이 얼른 귀를 입 가까이 대더니 통역했다.
"시가 걸리는 날, 지하철역에 나가보고 싶으시대요. 여기 식구들하고 다 같이 나들이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