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 오후, 풍산(豊山) 심(沈)씨 종친회원들이 허겁지겁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중턱에 올랐다. 이 집안이 배출한 조선 중기의 문신 심사손(沈思遜·1493~1528)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등산객 제보를 받고 달려온 것이다.
회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말을 잃었다. 봉분이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묘역에 가로 60㎝×세로 120㎝×깊이 60㎝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려 흙과 잔디가 범벅이 돼 있었다. 명백한 도굴 현장이었다.
심사손이 묻힌 개화산 기슭은 풍산 심씨 집안의 묘 50여기와 석인상 등이 모여있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2584㎡·781평)이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 등을 지내며 북방 오랑캐 정벌에 공을 세운 인물로, 오랑캐를 섬멸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사손의 아버지 심정(1471~1531)은 중종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아들 심수경(1516~1599)은 대사헌을 지냈다. 훼손된 심사손의 묘 인근에 있는 이들의 묘는 무사했다.
심사손의 묘를 비롯해 이 묘역에 있는 조선시대 묘 4기와 석물·신도비 등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서울에서 흔치 않은 문화재 도굴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즉시 서울 강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지만, 발생 3개월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강서서 관계자는 "범행 현장에서 지문이나 신발 발자국 같은 결정적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다"고 말했다.
종친회는 "400년 넘게 잘 보존돼온 묘가 처음으로 파헤쳐진 까닭에, 대체 무엇이 도굴됐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풍산심씨 대종회 심현종(沈鉉鐘·64) 총무이사는 "묘 앞에 석인상까지 세운 것을 보면 분명히 '보검' 같은 임금의 하사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덤 앞에 석인상을 세우는 풍습은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위세를 나타낸다. 이번에 사건이 난 묘역도 묘에 따라 문신과 무신을 형상화한 석인상이 서 있다.
전문가들도 '부장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선 중기 사대부들의 관습에 따라, 심사손도 회곽묘(灰槨墓)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목관 주위 6면을 석회를 발라 밀봉하는 구조다. 이 경우 유해뿐 아니라 부장품이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오랑캐 정벌에서 공을 세운 심사손의 이력과 중종반정 공신의 자제라는 신분을 감안할 때, 예복·도자기·청동제 그릇·묘지석 등 값진 문화재가 상당량 묻혀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비슷한 시대에 살다 간 사대부의 무덤과 비교하면 그런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지난 1997년 경북 영주에서 발견된 김흠조(金欽祖·1461~1528) 부부 묘에서는 의복 66점과 분청사기 등 유물 30점이 나왔다. 당대 유명 사대부들이 쓴 만사(輓詞·고인의 이력과 선행을 칭송하며 친분관계를 표시하는 글) 19점도 출토됐다. 김흠조는 충주목사와 장례원 판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심사손과 동시대 인물이다.
풍산심씨 종친회에서는 지난달 중순, 추석을 앞두고 심사손의 직계 후손 8명이 나서서 심사손의 무덤을 복원한 뒤 조상들께 예를 갖춰 축문을 읽는 '산신제'를 지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풍산심씨 묘역은 외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화산은 말이 산이지 '구릉'에 가깝다. 해발 131m에 불과해 도보로 20분이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 부근에 헬기장이 있고, 산 기슭 곳곳에 초소 같은 군사 시설들이 있다. 산 밑에 바로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이 있어 교통도 좋다. 서울시가 '조망 명소'로 꼽아 홍보할 정도로 풍광이 좋고, 고려 말에 창건된 절 '약사사'도 인근에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도 등산로 바로 옆이다. 심사손의 묘는 등산로 길섶에서 5~6m쯤 떨어져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봉분을 파헤쳐 부장품을 훔쳐가는 도굴꾼은 국내에 몇 명 남아있지 않다"며 "현장에서 검거하지 않을 경우 추적해서 잡기가 쉽지 않아 이번 사건도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