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안무가 홍영주 단장이 말하는 댄스의 추억
심장이 쿵쾅대는 빠른 비트,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신나는 구령에 빨려들듯 지하 연습실을 향했다. '대한민국 스타 안무가 1호' 홍영주 단장이 예의 환한 미소로 맞는다. 90년대 이후 댄스의 흐름을 그녀만큼 잘 아는 이는 없으리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1991년 '행진아이들' 1기, '민해경과 블랙타이거스'의 백댄서로 무대에 오른 지 올해로 19년째, 자타 공인 방송 댄스의 대모인 그녀가 잠실 홍댄스 연습실에서 하이컷(www.highcut.co.kr)에 털어놓은 대한민국 댄스 천일야화.
★90년대 이태원 문나이트 키드를 아시나요
90년대 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춤춘다고 하면 일단 저속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죠. 학원이나 학교가 전무하던 그 시절 춤꾼들이 춤을 연마한 곳은 이태원 문나이트였어요." 이태원 문나이트는 이주노, 양현석, 박철우, 도건우, 현진영, 강원래, 구준엽, 김성재 등 당시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춤꾼들의 아지트이자 메카였다. 이태원 미군 부대 흑인들의 '내추럴 본' 댄스는 뼛속부터 달랐다.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끈끈하고 탄력 넘치는 본고장 흑인 댄스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어깨 너머로 그루브를 익혔다. 손바닥만한 스테이지에선 밤이면 밤마다 댄스 배틀이 열렸다. 장안의 댄스 고수들이 한치 양보없는 대결을 펼쳤다. "한쪽에선 주노 오빠가 토마스(기계체조 안마와 유사한 브레이크 댄스 기술)를 휘저어대고, 커다란 선풍기 앞에선 현석 오빠가 현란한 스핀을 쉴새없이 돌았어요. 입이 떡 벌어지는 짜릿한 경험이었죠." 입장료 1만원에 술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아도 춤 사위에 흠뻑 취했던 그 시절, 오직 춤이 좋아 모여든 청춘들은 밤새도록 리듬에 몸을 맡겼다. 이태원 댄스 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언제나 '트왈라잇존'의 얼큰한 치즈라면. 어스름한 새벽에 눈이 벌게진 채 스테이지를 복기하며 들이키던 뜨끈한 국물 맛은 일품이었다. 춤 하나에 울고 웃던 이태원 문나이트 키드들에게 마이클 잭슨, MC해머, 바비 브라운 뮤직비디오는 최고의 교본이요, 지하철 역사의 미끄러운 바닥은 최고의 무대였으며, 젊음과 열정은 최고의 무기였다. 무용단 백댄서 캐스팅은 나이트 현장 오디션이나 입소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이뤄졌다. 훗날 '서태지와 아이들' '클론' 'REF' '룰라' '듀스'의 멤버로 가요계를 호령하게 되는 이들 역시 문나이트가 배출한 최고의 인재였다.
★최고의 춤꾼은 박진영, 최고의 몸치는 백지영?
90년대 청춘들은 '홍영주'하면 대번 박진영을 떠올린다. 박진영의 데뷔곡 '날 떠나지마'에서 선보인 그녀의 파워풀 댄스는 장안의 화제였다. 4명의 백댄서 중 홍일점 멤버였던 그녀의 밝은 표정과 역동적인 동작은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 '하우 투 댄스'라는 홍영주만의 코너가 생겼고, '마니마니춤'(구피) '닭날개춤'(룰라) 'ABC춤'(H.O.T) 등 춤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박진영, 쿨, 백지영, 김현정, 왁스 등 수많은 스타들의 히트 안무를 엮어내면서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대한민국 스타 안무가 1호'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런 홍단장이 최고로 꼽는 춤꾼은 역시 박진영이다. "90년대 초 가수 김수철씨와 함께 '박진영과 신세대' 앨범을 준비할 무렵 연습실에 벌러덩 드러누워 '나도야 간다'를 부르던 모습이 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이죠. 고릴라 얼굴에, 팔다리는 길고, 허리는 짧고... 저렇게 생긴 애가 가수가 될 수 있을까 했어요." 거울 앞에서 말도 안되는 동작을 네댓시간씩 반복하고, 새벽 연습 때면 체력이 딸릴까봐 햄버거를 입안에 우겨넣던, 꿈 많은 젊은이는 대한민국 대표 프로듀서가 됐다. 가까이서 지켜본 춤꾼 박진영은 자신감 넘치는 완벽주의자다. "진영이는 최고예요. 팔다리가 길어 동작이 정말 예쁘게 나오죠. 작곡과 안무를 동시에 진영이만큼 잘하는 가수는 없어요.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최고의 안무가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진영이 이상은 나오기 힘들 거예요." 박진영은 요즘 대세인 포인트 댄스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국민 댄스라고 불리는 춤들을 한번 보세요. 진영이 작품이 정말 많죠. '성인식' '그녀는 예뻤다' '허니' '텔미'까지... 안무의 포인트를 잘 잡고, 어려서부터 흑인 음악을 접해서인지 감이 정말 좋아요. 누구나 따라하기 쉬운 포인트를 귀신같이 만들어내죠." 그렇다면 홍단장이 기억하는 최고의 몸치 가수는 누굴까? 의외로 '절친' 백지영을 지목한다. 철이와 미애 이후 최고의 커플댄스, '내 귀의 캔디'에서 농익은 섹시댄스를 구사하는 그녀가 몸치였다니 내 귀를 의심할 밖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1집 '선택' 때만 해도 정말 춤을 못 췄어요. 연습실에 와서 처음 춤을 배운 셈인데 뻣뻣한 게 전봇대가 따로 없었죠." 하지만 2집 '대시' 이후 백지영의 실력은 눈에 띄게 늘었다. "아시다시피 연습벌레에 지독한 독종이에요. 몸 속에 있던 리듬감을 몸 밖으로 이끌어내더니 어느날 훌쩍 도약하는 단계가 왔죠." 화끈한 두 여자의 끼와 열정은 뜨겁게 통했다. '새드살사' 때 양재동 어느 골목 희뿌연 가로등 아래서 번쩍 들어올리는 고난도 동작을 기진맥진할 때까지 반복 또 반복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벅차다. 홍단장이 서슴없이 자신의 최고 역작이라 첫손꼽는 이유다.
★걸그룹 최고 춤꾼? 카라 니콜, 참 맛있게 추더라
3개월 만에 앨범 제작에서 방송 데뷔까지 전과정이 뚝딱 이뤄지던 90년대에는 타이틀곡 하나만 집중 연마한 후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노래 한곡만 죽어라 200번씩 반복 연습하는데 못 해낼 가수가 어디 있겠어요." 2000년대 들어 대형 연예기획사들이 생겨나면서 체계적인 신인 육성 프로그램이 도입됐고, 안무팀을 고용해 연습생을 트레이닝 시키는 시스템도 일반화됐다. '이효리 안무가'로 유명한 '나나걸스' 배상미 단장은 홍단장의 '민해경과 블랙타이거즈' 동기다. 이후 '손담비 의자춤'을 만든 프리마인드 곽기훈 단장, '시건방춤'의 핫칙스 배윤정 단장, '엉덩이춤'의 야마 김용현 단장 등 20~30대 능력 있는 후배 안무가들이 방송댄스계를 장악했다. 현장에서 지켜본 2000년대 아이돌의 가장 큰 특징은 준비된 스타라는 점. "리듬감이 이미 체득된 채로 연습실을 찾아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댄스 음악을 듣고 자랐고, 노래방이나 무대에도 익숙한 세대니까요. 거기다 몇 년씩 고된 연습생 생활을 거치면 기본기가 탄탄해질 수밖에요." 아이돌 멤버 중 최고의 춤꾼을 뽑아달라는 주문엔 난색을 표한다. "요즘엔 누가 제일 잘한다고 말하기 힘들어요. 힙합, 디스코, 재즈, 브레이킹 등 댄스 장르가 정말 다양하잖아요. 포미닛 현아는 섹시댄스, 2NE1 공민지는 스트리트댄스, 소녀시대 효연은 팝핀을 잘한다 식이죠." 그래도 예리한 그녀의 눈에 쏙 들어온 걸그룹 멤버는 카라의 니콜이다. "엉덩이춤을 출 때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한 게 보였어요. 도약의 시기가 온 거죠. 우린 춤을 잘 춘다고 하지 않고 춤을 맛있게 춘다고 하거든요. 동작을 단순 반복하는 게 아닌, 춤을 갖고 노는 단계죠." 그녀가 생각하는 히트 안무의 공통점은 쉬워보이되 막상 따라하기는 쉽지 않은 춤이다. 경험상 히트 안무는 책상머리에서 나오기보단 몸을 흔들며 놀다 우연히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요즘도 후배 강사들의 댄스 수업에 학생으로 참석한다. 잠자고 먹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꼬박 음악을 듣는다. 국내외 최신곡을 줄줄 꿰고 있음은 물론이다. 서울종합예술학교 출강, 학원 '홍댄스' 운영, 돌 지난 아들 지완이 육아... 눈코뜰새없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 뮤직뱅크> 등 가요 순위 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챙겨본다. "트렌드를 놓치면 안되니까요. 20대 초반의 감각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면 이젠 공부하고 배워야 해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각 잡힌 슈트보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녀, 몸치라는 기자를 향해 단언한다. "타고난 몸치는 없어요. 내 안에 감춰진 리듬감을 꺼내보세요. 훈련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어요. 천하의 백지영도 처음엔 몸치였다니까요. 하하."
<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