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된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70년 넘게 이 한옥을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재개발로 이 집이 허물어진다니…."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한옥 3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중 가운데 집, 검게 때가 탄 화방벽(돌 섞은 흙으로 쌓은 벽)으로 둘러싸인 1-223번지가 송병훈(88)씨의 집이다. 외풍이 센 한옥 구조 탓에 검은색 패딩점퍼에 주황색 스웨터까지 껴입은 송씨는 아버지의 옛 사진과 스크랩한 기사들을 보여주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잇(있)다. 언더우드 社(사)에서 製作中(제작중).' 노랗게 바랜 오래된 신문기사 조각에는 그의 아버지 사진이 실렸다.
송씨의 아버지는 공병우 박사의 한글타자기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를 만든 송기주씨다. 당시 타자기는 자판이 복잡하고 타자 열이 고르지 않아 실용성이 적었는데, 송기주씨가 미국 유학시절 뉴욕의 타자기 제조회사 언더우드사와 함께 만든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는 42개의 키로 한글을 고르게 찍을 수 있어 주목받았다. 송기주씨는 시카고에 있을 때 한국 지도를 최초로 서구식 입체 본으로 떠내기도 했다. 그가 1934년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를 만들어 귀국했을 때 국내 지식인들이 기생집 명월관에 모여 자축 파티를 했고, 그 파티가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송병훈씨의 기억에 '아버지의 타자기'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당시 타자기 가격이 사무실용은 550원, 휴대용은 239원으로 '집 한 채' 값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타자기를 사용하기 위해 많은 지식인이 송씨의 북아현동 집을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우리 집은 북아현동에 살았던 지식인들 모임 장소였어. '자유부인'을 쓴 정비석씨, '바우고개' 작곡가 이흥렬씨도 자주 드나들었지." 송병훈씨는 현재 북아현동의 고풍스러운 한옥가를 생생히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글타자기를 최초로 시장화한 공병우 박사도 이때 북아현동을 찾아 송기주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공병우 박사의 제자인 송현 한글문화원 원장은 "송기주 박사 귀국 후 공병우 박사가 발명권 양도를 교섭하기 위해 찾아갔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송 박사가 납북된 후 공 박사가 송 박사 방식의 타자기를 참고해 편리하게 발전시켜 시장화했다"고 말했다.
송병훈씨와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들은 모두 해방 후 이사하고 지금은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북아현동 다른 한옥들은 대부분 1990년대 초반 다세대주택이나 빌라로 개조됐다. 송씨 집은 그가 연세의료원에 다닐 때 마루를 새로 깐 게 전부다.
"우리도 강남 큰 아파트로 이사할 기회가 있었어. 그런데 어머니께서 '아버지 돌아오실 때 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니 난 (이사) 안 간다. 나는 관으로 나가지 안 나간다' 그랬거든. 그런데 이제 끝난 것 같아요. 아버지가 1900년생이니 살아계셔도 100살이 넘어…."
송씨의 아버지는 6·25전쟁이 난 해 9월 17일 납북됐다. 송병훈씨는 1951년 1·4후퇴 때 어머니와 남동생을 데리고 경남 진해로 피란 갔다가 2년 후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인민군이 마구간으로 쓴 탓에 마룻바닥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집이 망가지지 않은 건 송씨의 외할머니가 '사위가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이유로 집을 떠나지 않고 지킨 덕이다. 송씨는 "인민군이 들어와 된장·고추장을 퍼먹으면 '우리 아들 딸이 먹을 건데 왜 퍼먹느냐'며 싸우고 그랬대. 그래도 노인네니까 내버려 둔 거지"라고 했다.
송씨는 불편한 재래식 부엌과 바람이 많이 드는 한옥의 구조 탓에 고생이 많지만 그래도 이 집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소망은 머지않아 무너지게 됐다. 북아현동 일대가 뉴타운 개발구역으로 지정돼 곧 철거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송씨는 "그저 여기를 아파트로 안 만들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밖에 없어. 원하는 사람은 그대로 살라고 했으면 좋겠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송씨의 사연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뉴타운 사업으로 사라지는 동네와 주민 이야기를 담아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 담겼다.
신장이 안 좋아 거동이 불편한 송씨는 모아 놓은 사진·우표 등을 보며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개발한 타자기도 가끔 꺼내 본다고 한다.
"아버지가 쓰던 타자기는 인민군이 가져가고, 나는 피란길 대구의 한 구멍가게에서 같은 종류의 타자기를 발견했어. 그런데 그 타자기를 살 50만원이 없어 친구들로부터 돈을 꾸어 간신히 샀지. 이 타자기가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야." 송씨는 "이게 하나밖에 없으니 여기저기서 달라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죽기 전에는 가지고 있을 거야"라며 '아버지의 타자기'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