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살았습니까? 그곳에서 일했습니까? 그렇다면 정부가 돌봐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말 미국 뉴욕의 지하철 E호선에서 이런 제목의 광고를 발견했다. 여기서 '그곳'이란 세계무역센터(WTC) 건물 일대를 말한다. 11년 전 발생한 9·11 테러 당시 현장에서 유독가스와 먼지를 들이마신 사람이라면 구조 활동을 했던 소방관·경찰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정부가 치료를 책임져 주겠다는 의미였다. 이 광고는 그동안 호흡기 질환에 한정했던 지원 대상 질환을 지난달 백혈병·림프종 등 다른 암(癌) 50여종으로 크게 확대한 것을 계기로 새롭게 내걸렸다.
이 광고의 근간이 되는 것은 '제임스 자드로가(Zadroga) 9·11 건강·보상법'이다. 자드로가는 9·11 당시 현장에서 약 450시간 동안 구호·시신 수습 활동을 했던 경찰관의 이름이다. 그는 테러 몇 주 뒤부터 기침과 호흡 곤란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수개월 뒤에는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했다. 미국 정부는 2004년 그에게 100만달러(약 11억원)를 보상했다. 그는 35세가 되던 2006년 숨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그의 질환이 약물 복용에 따른 것이라는 논란도 제기됐다. 그러나 미 정부는 최종적으로 '순직(殉職)'을 인정했고, 그는 숭고한 희생을 상징하는 '영웅'으로 관련 법에 이름까지 남겼다.
광고를 본 순간 뇌리에 스친 이름이 있었다. '김진근'이었다. 그는 2003년 2월 18일 오전 10시 13분 대구 지하철 방화 발생 20분 만에 대원 7명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앙로역 입구에 맨 처음 도착했던 소방대장이다. 현장에 출동했던 한 대원은 당시 상황을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암흑, 얼굴에 후끈 와 닿는 열기, 세 모금만 마셔도 죽을 것 같은 가스 등 정말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망설임 없이 '지옥'으로 뛰어든 김 대장과 대원들은 시민41명을 구출했고 시신 13구를 수습했다. 이어 김 대장은 부하들을 병원에 보낸 뒤 밤을 새워 현장을 지켰고, 다음 날 새벽에 잠시 귀가해 옷만 갈아입고는 다시 현장에서 일했다. 얼마 뒤부터 자지러질 듯한 기침이 찾아왔고, 8개월 후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전년도 건강검진까지도 멀쩡했던 몸이었다.
여기까지는 자드로가의 이야기와 닮았다. 미국을 위해 몸을 바친 경찰관과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소방관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병을 얻은 김 대장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퇴짜였다. 담배를 20년 동안 피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듬해 10월 김 대장은 끝내 세상을 떴다. 1억원이 넘는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족은 유족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이 역시 흡연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수시로 유독가스를 마시는 소방관 업무가 폐암과 무관하다는 판정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사 소견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유족은 "소방관으로서 순직했다는 명예만이라도 찾고 싶다"며 마지막으로 법원에 기댔지만 법원도 두 차례 판결을 뒤집은 끝에 2007년 8월 결국 연금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지친 유족은 더 이상 소(訴)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김진근은 잊혔다.
입력 2012.10.0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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