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하시엔다 나폴레스 테마파크에 있는 하마. 과거 마약왕 에스코바르의 개인 동물원에 있다가 이곳으로 왔다. 일부는 인근 강으로 빠져 나가 야생 하마가 됐다.

콜롬비아의 마약왕인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1993년 경찰과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에스코바르가 죽자 집에서 키우던 하마 4마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지금, 이 하마들이 인근 강과 호수에 자리 잡아 100마리 가까이 불어났다. 남미에는 원래 하마가 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외래종인 하마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도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이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남미의 하마처럼 세계 곳곳에 새로 유입된 대형 초식동물들이 자연을 인간이 손대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과연 마약왕의 하마는 민폐일까, 아니면 복덩이일까.

호주 시드니 공대의 애리언 월릭 교수 연구진은 지난 23일 국제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지난 10만년 동안 인간이 멸종시킨 대형 초식동물과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온 외래 초식동물의 생태적 형질을 비교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몸무게와 보행, 소화력, 서식지 등을 기준으로 비교했더니 새로 도입된 초식동물의 64%가 멸종한 동물과 유사했다고 밝혔다. 외래종이 멸종한 동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콜롬비아의 하마는 1만년 전 멸종한 대형 라마를 대신할 수 있다. 하마의 몸무게는 1417㎏으로 멸종한 라마(1000㎏)와 비슷했다. 하마는 라마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되새김질하지 않고 보행 형태도 둘 다 발가락 끝으로 걷는 지행(趾行·digitigrade)이었다. 다만 라마가 육지에만 사는 반면, 하마는 뭍과 물을 오가며 산다는 점이 달랐다. 역시 호주에 들어온 낙타는 빙하기에 멸종한 대형 유대류인 ‘팔로르케스테스 아질(Palorchestes azeal)’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말이나 멧돼지처럼 이전에 그곳에 살던 같은 동물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물소가 아르마딜로가 살던 곳에 들어가고 사슴이 캥거루 자리에 정착하는 것처럼 생김새가 전혀 후계자도 많았다.

연구진은 외래종들은 이미 생태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호주에 들어온 물소는 산불의 강도와 횟수를 줄였다. 멸종한 대형 유대류처럼 풀과 나뭇잎을 적절히 조절해 불쏘시개를 줄였다는 것이다. 남미의 하마는 뭍에서는 멸종한 라마처럼 풀을 뜯고, 물에서는 멸종한 코뿔소처럼 배설물로 수중 생태계를 비옥하게 한다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실제로 대형 초식동물을 도입해 원시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과학자들도 있다. 러시아의 지구물리학자 세르게이 지모프는 아들과 함께 1996년부터 시베리아에 들소와 야생마 등 대형 초식동물을 도입해 1만년 전 매머드가 살던 상태로 복원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들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겨울에 시베리아의 눈은 동토층을 한기(寒氣)로부터 보호해 온난화와 더불어 더 빨리 녹게 한다. 초식동물이 풀을 뜯느라 눈을 파헤치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다. 여름에는 초식동물 덕분에 숲이 줄고 초원이 늘어난다. 초원은 숲보다 햇빛 흡수량이 적어 지표 온도가 덜 올라간다. 결국 초식동물은 동토층의 온도가 올라가지 못하게 해 메탄 방출을 막는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다. 하마의 배설물로 인해 콜롬비아 수중 생태계에 녹조가 심해졌다는 보고도 있다. 연구진도 “새로 동물을 도입하지는 게 아니라 이미 도입된 동물의 특성을 연구한 것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논문의 공동 저자인 미국 매사추세츠대의 존 로원 교수는 “인간 때문에 포식자가 사라지고 서식지가 파편화된 것이 문제지 초식동물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