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피천득(1910~2007)은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스스로 잘나고 훌륭해서 지금의 자신이 있지 않다. 지금의 내가 있는 까닭은 나를 존재하게 한 수많은 인연의 결과다. 스쳐 갈 뻔한 만남이 삶으로 스며들며 이루어진 인연, 여러 명사의 마음에 남은 다양한 인연의 곡진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첫 회로 배우 신현준이 고(故) 김수미와 만난 인연을 회고했다.

배우 신현준(57)은 지난해 10월 배우 김수미의 부고를 공항에서 들었다. 일본 팬미팅 행사차 출국하던 길이었다. “불과 닷새 전 통화에서 ‘생일 꽃 보내줘서 고마워’라고 하신 목소리가 생생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신현준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부고를 듣자마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는데, 어떻게 도착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제게 엄마와 다름없는 분이 그렇게…”라며 잠시 목이 멨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1990)에서 종로 일대를 접수한 야쿠자 두목 하야시 역으로 데뷔한 신현준에게 김수미는 ‘영화가 만들어준 엄마’다. 올해로 데뷔 35년, ‘장군의 아들’ 1~3편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드문 얼굴”(임권택 감독)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는 판타지 대작 ‘은행나무 침대’(1996·감독 강제규)의 악역 황장군으로 스타가 됐다. 김수미와 이어진 영화는 ‘가문의 영광’ 2편인 ‘가문의 위기’(2005)였다. 우연히 본 코미디 영화 ‘마파도’(2005·감독 추창민)가 계기였다. 대마초가 지천으로 자라는 미지의 섬 마파도의 욕쟁이 할머니로 나온 김수미의 코믹 연기에 반했다. “우리 영화에 찰떡이네, 찰떡.” 곧바로 ‘가문’ 제작사에 “한 번만 ‘마파도’를 봐달라”고 추천했다. 제작사에서는 적역이라며 반겼고, 원래 보스 역을 맡기로 했던 백일섭도 “그래, 수미가 더 잘 어울리겠다”며 흔쾌히 동의해 김수미와 신현준의 동반 출연이 확정됐다.
촬영장에서 처음 본 김수미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함부로 말붙이기 어려운 선배’였다. 김수미에게 신현준은 ‘스파게티나 먹게 생긴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데면데면한 선후배로만 남을 뻔했던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한 권의 시집이었다. 촬영이 빈 틈에 신현준이 읽고 있던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보고 김수미가 반색하며 말을 건넸다. “나, 류시화하고 친해.” 알고 보니 김수미는 베스트셀러라면 빠짐없이 챙겨 읽는 애서가였다.
책이 틔워준 마음의 길은 밥을 같이 먹으며 더 넓어졌다. ‘스파게티나 먹게 생긴’ 신현준이 사실은 청국장을 좋아하는 구수한 청년이란 걸 알게 된 김수미가 “어쩜 나랑 이렇게 입맛이 똑같냐”라며 챙겨 먹이려 애썼다. 도시락 싸왔다고 나눠주고 떡 사와 입에 넣어주는 김수미는 어느새 극 중 어머니가 아니라 실제 어머니처럼 푸근해졌다. 호칭도 엄마가 됐다. 신현준은 “엄마와 저는 기본적으로 결이 같은 사람”이라며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통하는 부분이 많아 속까지 터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현준이 촬영장에서 보여준 배우로서의 자세도 김수미의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너 날라린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감정 조율하려고 연습하고 공부하는 거 보니 기특하더라”라고 나중에 말해줬다.
두 사람은 ‘맨발의 기봉이’(2006), ‘가문의 부활’(2006), ‘가문의 수난’(2011)을 잇따라 함께하며 연기 동료이자 선후배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가끔은 김수미가 타박도 했다. 신현준이 지나치게 예의가 깍듯하다고 섭섭해 했다. “나보고 엄마라면서 왜 사위처럼 구느냐”는 말에 “제가 엄마를 배우로서도 너무 존경하고 동시에 사랑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면 바로 누그러졌다.
지난달 설 연휴 개봉한 영화 ‘귀신경찰’에서 김수미와 신현준은 순대국집 사장인 엄마와 번개를 맞고 초능력이 생긴 경찰 아들로 나온다. ‘맨발의 기봉이’ 촬영 때 남해 다랭이마을 언덕배기에 앉아 쉬던 김수미가 “현준아, 우리 선량한 사람들이 좋아할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했던 말이 숙제처럼 남아 찍게 됐다. ‘귀신경찰’ 촬영장에서도 김수미는 신현준이 배고플 새라 꽈배기며 간식거리를 챙겨와 쉬지 않고 권했다. 작품을 끌고 갈 힘을 불어넣어준 이도 김수미였다. 신현준은 ‘귀신경찰’이 코미디이면서도 메시지가 있는 가족영화이길 원했다. 극중 고등학생 딸과의 갈등과 화해도 중요하게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투자사에서 반대했다. “무조건 코미디로 가자”고 했다. 투자사의 거센 입김에 신현준이 흔들리려 하자 김수미가 등을 두드렸다. “내가 난리쳐줄 테니까 원하는 장면 빼지마.” 개봉하고 나니 빼지 않고 살린 가족 이야기에 관객 반응이 특히 좋았다. “엄마 저 잘했지요, 말씀드리고 싶어요. 뿌듯합니다.”
원래는 김수미에게도 초능력이 생기는 ‘귀신경찰’ 2편으로 이어갈 생각이었다. 어벤저스처럼 번개 초능력자들이 모인 ‘번벤저스’ 시리즈를 구상했다. 일부 촬영도 했으나 김수미가 작고하며 꿈으로만 남게 됐다. 대신 관객과 따뜻함을 나누고 싶어하던 김수미의 유지(遺旨)를 이어가기 위해 ‘귀신경찰’ 유료 관객 1명당 200원씩 모아 기부하기로 했다. 신현준은 “엄마의 마지막 영화를 많이 보시고 웃음 선물을 받아가셨으면 좋겠다”며 “제가 배우로 사는 한, 엄마의 뜻이 잊히지 않도록 살려나가겠다”고 말했다.
“멋진 인간이 멋진 배우가 된다” 간직하고 있는 김수미의 한마디
배우 신현준은 연기 선배인 ‘엄마’ 김수미가 촬영장에서 일러준 한마디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멋진 인간이 멋진 배우가 된다”는 말이다. 데뷔작 ‘장군의 아들’(1990)을 찍으며 연기를 처음 배울 때 임권택 감독이 수시로 강조하던 ‘중요한 건 인간 됨됨이’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었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다리미 패밀리’의 옷 잘 입는 회장님 역으로 장편 드라마 부문 남자 우수상과 베스트커플상을 받은 그는 시상식장에서 박수를 받는 대선배 이순재와 김용건을 보며 다시 한번 김수미의 한마디를 떠올렸다고 했다.
김수미와 주고받던 연기 모니터링 안부 문자를 요즘 또 다른 대선배인 최불암에게 받는다. 문자 끝에 확인 서명처럼 ‘불암’을 붙이는 최불암은 ‘오늘도 연기 좋았다, 불암’이라며 잊지 않고 문자를 보내온다. 신현준은 “오래 사랑받는 배우, 포용력 있는 어른의 자세를 대선배들을 보며 끊임없이 배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