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그룹의 계열사 현직 대표였던 L 사장은 작년 말 인사에서 퇴직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퇴임만큼이나 임직원들이 놀란 것은 ‘고문’ 예우가 없다는 회사 방침이었다. 경영상의 문책이 아니라 ‘인사 제도 변경‘이 이유였다. 20년 가까이 회사에 몸담으며 대표직도 수차례 역임한 ‘핵심 인사‘였던 데다, 이전까지 회사가 퇴직 임원에게 최소 2년 정도의 고문 예우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임직원들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재계에서도 ‘의리‘를 사훈(社訓) 격인 ‘그룹 정신‘으로 강조해온 한화가 이 같은 제도를 전격 폐지한 것에 대해 놀라는 분위기다.
7일 재계에 따르면, 한화그룹의 일부 계열사는 최근 경영 상황을 이유로 이 같은 퇴직 임원 예우 제도를 없앴다. 아직은 유통·로봇 등 일부 계열사에 한해 적용되고 있지만, 각 사의 경영 상황에 따라 이 같은 기조가 그룹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이처럼 고문 예우를 없애는 것이 재계의 ‘뉴 노멀(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불황 속 퇴직 임원 예우 축소
재계에서 ‘대기업의 별‘이라 불리는 임원에 대한 ‘퇴직 예우 프로그램‘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 현재 삼성은 ‘고문(상근/비상근), 상담역, 자문역‘, SK는 ‘경영자문위원‘, 현대차는 ‘고문, 자문‘, LG는 ‘고문역·자문역’ 등 다양한 이름으로 퇴직 임원을 예우하고 있다. 기업마다 다르지만 통상 1~2년 정도, 임원 재직 당시 급여의 50~80%와 공용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이다. 대표이사 출신 등 일부 핵심 임원은 개인 사무실과 차량과 기사, 비서를 주고 예우 기간도 더 길게 주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제도는 퇴직 후에도 회사의 중역이 수년간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다음 커리어를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할 뿐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도 비밀을 유지하고 경쟁사에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는 복합적인 목적이 담긴 것이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함께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주요 그룹들이 일제히 고문제를 폐지하거나, 예우 기간과 수준을 줄이고 나선 것이다. 삼성은 ‘반도체 불황‘이 한창이던 지난 2023년 말 최고 예우인 ‘상근 고문’ 제도를 크게 축소한 데 이어, 최근에도 퇴직 임원의 예우 기간을 기존 2년에서 ‘기본 1년’ 혹은 ‘1+1년‘으로 축소하는 기조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특히 재무·인사·기획 등 소위 잘나가는 부서 고위 임원의 경우 2~3년 정도 예우를 받았지만, 최근엔 ‘자문역 1년‘만 딱 받고 퇴사하는 게 기본”이라며 “기여도가 높은 일부 사장은 종종 고문 예우를 받고 추가로 상담역을 지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엔 곧바로 상담역으로 위촉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SK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과 강남구 삼성동에 각각 운영하던 퇴직 임원 전용 공간인 ‘아너스라운지‘를 축소하기로 했다. SK 본사 인근의 서린동 사무실을 없애고 강남만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 측은 “임원들의 이용률이 저조해 통합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득보다 실” 우려도
제도 축소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과거에는 임원 숫자가 많지 않아 퇴임 후에도 최고 예우가 가능했는데, 임원 숫자가 크게 늘면서 이를 동일하게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로 꼽힌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 2004년에는 상무 이상 임원이 200여 명이었지만, 2014년엔 700여 명, 지난해에는 13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재계 관계자는 “회사 실적이 안 좋으면 임원 승진을 줄이고 퇴직자를 늘리는 식으로 조직 규모를 슬림(slim)하게 가져가는 경우가 많은데, 고연봉인 임원들을 과거처럼 예우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또 퇴직 임원 예우는 ‘회사 기밀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입단속 차원도 있었는데, 점차 회사 경영이 투명해지면서 이런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대기업 임원은 “청춘을 한 회사에 바쳤지만 퇴직 후에도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재직 중에도 다음 커리어를 고민하는 임원들이 많다”며 “퇴임해도 받을 수 있는 고문 기간이 짧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진 게 사실”이라고 했다. 다른 임원은 “특히 엔지니어들의 경우엔 고액 연봉과 예우를 약속하는 중국 등 해외 기업들의 유혹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